여기 ‘가짜발명가’가 있다. 그는 “사용 및 제작 설명서를 참고하지 않은 채” 이미 만들어진 물건들을 조립하곤 한다. 어느 날 가짜발명가는 도시를 떠나 작은 섬에 도착한다. 이 섬에 새가 지나치게 많아지자, 그는 빨간 눈과 흰 털을 가진 토끼들을 풀어놓기로 한다. ‘토끼가 어린 새를 다 먹어치우리라’ 가정하면서. 과연 토끼들은 그가 원하는 먹이사슬을 구현해줄까?
한국에서 지난해 10월 출간된 스페인 작가 엘비라 나바로(47)의 소설 『토끼들의 섬』(비채) 표제작은 이런 가정으로부터 출발한 작품이다. 11편의 단편 속 작가의 독창적인 상상을 따르다 보면 어느새 현실과 연결되어 섬찟함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나바로는 2007년 10대 소녀 클라라의 성장통을 그린 『겨울의 도시』(La ciudad en invierno)로 데뷔한 18년 차 작가. 2009년 발표한 소설 『행복한 도시』(La ciudad feliz)는 스페인에 이민 온 중국인 어머니와 아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이 작품으로 스페인어권 작가들의 최고 등용문으로 꼽히는 하엔 소설상과 토르멘타엔운바소 신인작가상을 수상하며 현지의 주목을 받았다.
스페인에서 2019년 발표한 단편집 『토끼들의 섬』은 2021년 미국의 유서 깊은 문학상인 전미도서상 번역문학 부문 후보에 오르며 “카프카와 보르헤스의 문학적 성취를 이어받은 걸작”이란 평을 받았다. 그러나 스페인어권 문학이 낯선 한국에선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다.
지난 16일 서울 종로구에서 열린 ‘서울국제작가축제’(12~17일) 초청으로 내한한 엘비라 나바로를 따로 만났다. 그의 소설 중 유일한 한국어 번역본 『토끼들의 섬』을 낸 김영사(비채) 서울사무소에서다. 전날 김초엽·김성중 작가, 황여정 작가와 각각 대담한 엘비라는 “전혀 모르는 곳에서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만났다. 새로운 책을 발견하는 독자의 기분을 느꼈다”고 소개했다.
Q : 스페인 문학계에도 한국 문학이 많이 소개돼있나.
A : “지난해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한국 문학이 많이 소개되고 있다. 한강 작가의 작품은 모두 번역, 출간됐고 김초엽 작가의 책도 번역되고 있다. 특히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한 한강의 『채식주의자』(2007)는 많은 스페인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스페인어권에선 영어권 문학이 가장 큰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지만, 한국 문학의 경우에 소개된 양에 비해 영향력이 굉장히 크다.”
Q : 한국 독자들에게 본인의 작품세계를 소개한다면.
A : “내 작품은 현실주의에 한쪽 발을, 기묘함에 다른 쪽 발을 담그고 있다. 여기에서 기묘함은 환상과 다른 개념이다. 나는 현실이 고정되어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언제든 깨질 수 있는 허구의 구성물이라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이 더는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가 아니라면’을 가정하는 소설이 많다.”
Q : 이런 소설을 쓰기까지의 배경이 궁금하다.
A : “어릴 때 외로운 소녀였다. 스페인 남부 지역의 한 시골 마을에서 할머니의 손에 자랐는데, 할머니께서 나를 자유롭게 두셨다. 당시 책을 통해 아름답지 않은 현실 속에서도 큰 위로를 받았던 경험이 있다. 그것이 지금의 내 정체성에 많은 기여를 한 것 같다.”
『토끼들의 섬』의 엄지영 번역가는 “을씨년스럽고 음산하기 짝이 없는, 그래서 불편하기까지 한 기이한 세계를 그려낸다”며 “엘비라 나바로는 부패한 삶의 조건이야말로 새로운 삶의 형식으로서의 이야기가 싹을 틔우기 위한 최상의 조건이라고 생각한다”는 평을 남겼다. 그가 쓰는 소설이 곧 ‘가짜 발명가’의 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엘비라는 그 표현에 공감하며 “우리 인간이 곧 ‘가짜발명가’가 아닌가 생각한다. 태어날 때는 아무것도 모르다가, 살면서 이미 만들어져있던 세상을 발견하는 과정을 모두가 거친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글쓰기가 “우리의 세상, 인간, 나아가 자신을 발견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Q : 『토끼들의 섬』이 전미도서상 후보에 오르며 ‘지금의 유럽사회가 당면한 불안을 이야기하는 작가’라는 평을 받았는데.
A : “유럽에 사는 나로서 이 모든 것들로 인한 불안이 불가피하게 작품 속에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중산층 붕괴로 유럽사회 내 경제적 격차가 심해졌고,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 등 미국사회의 변화로 인해 유럽정치에도 불안정성이 도래했다. 특히 스페인의 젊은 세대들을 중심으로 파시즘 가치에 기반을 둔 정당을 지지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Q : 스페인 문학계의 현안이 궁금하다.
A : “오랫동안 스페인 내전(1936~1939)을 다루는 내용의 책이 많았다. 특히 스페인의 경우 프랑코 독재(1936~1975) 시기를 겪었던 국가이기 때문에 당시 국가폭력을 다루는 책도 같은 시류를 이뤘다. 최근엔 한국처럼 여성독자들이 늘고, 여성작가들의 소설도 많이 주목받고 있다. 아직 주류라고 할 순 없지만, 중남미 출신 작가들을 중심으로 환상(판타지) 문학과 공포문학의 입지도 늘고 있다.”
Q : 그 속에서 본인이 쓸 다음 작품이 있다면.
A : “다음 달 출간될 단편집이 있다. 『마당에 피가 떨어진다』는 제목이다. 『토끼들의 섬』이 개념적 요소가 들어간 단편집이라면, 신간은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물질적인 세상을 그려내려고 했다. 아직 한국 출간예정인 작품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