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0억 달러(약 490조 원) 규모의 대미 투자 펀드 운용 구조를 둘러싸고 한·미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진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압박이 한층 거세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25일(현지시간) 한국이 약속한 3500억 달러는 ‘선불’이라고 못박았다. 무역 협상을 총괄하는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은 투자 금액을 일본이 약속한 5500억 달러(약 770조 원)에 근접하는 수준으로 늘려야 한다고 요구했다는 월스트리트저널(WSJ) 보도 역시 나왔다.
이재명 대통령이 뉴욕 유엔총회 방문을 계기로 가진 스콧 베센트 미 재무장관과의 전날 면담에서 “한국과 일본은 경제 규모, 외환시장 구조 등이 크게 다르다”며 미국 측 요구를 대부분 수용한 일본의 선례를 따를 수 없다는 뜻을 밝힌 다음 날 벌어진 일이다. 무역 합의 후속 문서화 과정에서 한·미 간에 노출된 간극이 더욱 커져가며 난항을 예고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에서 중국계 동영상 플랫폼 틱톡의 미국 내 사업권 매각과 관련된 행정명령에 서명한 뒤 “우리(미국)는 무역 협상에서 매우 잘하고 있다. 9500억 달러를 벌어들였다”고 말했다. 9500억 달러는 유럽의 대미 투자 금액을 가리킨 것으로 풀이된다. 그는 이어 “일본은 5500억 달러, 한국은 3500억 달러”라며 “그것은 선불(It’s up front)”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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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 선불론’ 협상 압박 일환 분석
3500억 달러 규모의 투자펀드 운용 방식을 둘러싸고 한·미 간 이견이 좁혀지지 않는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불쑥 ‘대미 투자 선불론’을 편 것은 협상을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가려는 압박 차원으로 분석된다.
앞서 한·미 양국은 지난 7월 30일 미국이 한국에 부과하는 상호관세와 자동차 관세를 기존 25%에서 15%로 낮추는 대신 한국이 3500억 달러를 미국에 투자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투자펀드 자금 조달 방식과 수익 배분 구조를 놓고 양국 입장차가 커 후속 문서화 협상이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한국은 투자 금액 대부분이 대출 및 보증 형식이고 직접 투자는 일부일 뿐이라는 입장인 반면 미국은 직접적 지분 투자 방식으로 현금을 받고 수익의 90%를 미국이 가져가는 일본식 합의 모델을 고수하고 있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전날 브리핑에서 “미국이 양해각서(MOU)라고 보낸 문서를 보면 상당히 ‘에쿼티(equity·현금 투자)에 가깝다”고 했다. 이재명 정부가 미국에 대미 투자 이행과 관련해 양국 간 통화 스와프 체결을 선결조건으로 제시하고 나선 것은 그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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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SJ “러트닉 ‘투자금 日과 비슷해야’”
하지만 미국 반응은 상당히 부정적이다. 게다가 아예 투자 규모 증액을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WSJ은 “러트닉 상무장관이 한국 정부 인사들과의 대화에서 3500억 달러 규모의 투자를 증액하는 방안을 거론했고, 최종 금액이 일본이 약속한 5500억 달러에 가까워지는 방안을 논의했다”고 보도했다.
이와 관련해 백악관 관계자는 “미국이 한국과의 무역 협정을 미세 조정 중이지만 기존 합의안에서 드라마틱하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고 WSJ에 말했다. 투자 규모 증액을 요구했다는 보도를 부인하지는 않은 셈이다. 러트닉 장관은 또 투자 금액 상당 부분을 대출이 아닌 현금으로 받기를 원한다는 뜻을 피력했다고 한다.
반면 한국 산업통상자원부는 러트닉 장관이 대미 투자액 증액 요구를 한 적이 없다는 입장이다. 산업통상자원부 측은 “대미 투자 금액을 더 늘리라는 요구를 받은 바 없다”고 했다.
WSJ은 “한국과의 무역 협정이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다. 한국 측은 백악관이 골대를 옮기고 있다고 주장한다”며 “한·미 무역 협정은 미국이 수십 개 국가와 진행 중인 광범위한 관세 협상의 핵심 지표가 된다”고 짚었다. 한국처럼 공식 문서 없이 구두 합의 상태인 무역 협상 대상국들이 한국의 후속 협상 결과를 준거 척도로 삼을 거란 의미다.
한·미 양국 간 후속 협상의 장기화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이 예정된 10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APEC) 정상회담이 무역 협상의 중대 분수령이 될 거란 전망이 나온다. 정부 한 관계자는 “결국 협상의 큰 틀을 결정짓는 사람은 트럼프 대통령 한 명으로 압축된다”며 “톱다운 방식의 트럼프 의사결정 스타일을 감안하면 APEC 회담이 협상 타결의 중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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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부터 의약품 관세 100%”
이런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은 10월 1일부터 의약품에 관세 100%를 부과한다고 하는 등 품목별 관세폭탄을 줄줄이 예고했다. 그는 소셜미디어 글을 통해 “미국에 의약품 제조 공장을 건설하고 있지 않은 기업에는 10월 1일부터 모든 브랜드 의약품, 특허 의약품에 100%의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고 했다.
또 “미국 제조사들을 불공정한 외부 경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며 10월 1일부터 외국산 대형 트럭(11.8톤 이상 트럭 및 트랙터·트레일러 등 세미 트럭)에 25%, 주방 수납장과 욕실 세면대 및 관련 제품에 50%, 천을 씌운 가구류(Upholstered Furniture)에 30%의 관세를 각각 부과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관세폭탄은 특정 품목의 수입이 미국의 국가안보를 위협한다고 판단될 경우 대통령에게 관세 부과 등 권한을 부여한 무역확장법 232조에 근거한 것으로 풀이된다.
새로운 반도체 관세 압박 수단도 강구 중이라는 보도 역시 추가되고 있다. WSJ는 26일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미 정부가 반도체 기업이 미국 내에서 제조한 반도체와 해외 공장에서 수입된 반도체의 비율을 1대1로 맞추도록 의무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보도했다. 미국 내에서 반도체 100만개를 생산하겠다고 약속하면, 같은 수량의 반도체에 대해 무관세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WSJ은 미국의 마이크론 테크놀로지 및 글로벌파운드리, 대만의 TSMC 등 미국 내 생산을 확대하고 있는 기업들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또한 한국 반도체 생산기업들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도 주목되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