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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이 믿고 맡기는 유일한 혈맹…'숨은 실세→2인자' 김여정 [월간중앙]

중앙일보

2025.09.25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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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명의 평양 랩소디|김정은의 ‘스피커’ 김여정 탐구

김정일 각본으로 시작된 ‘김여정 카드’…권력 지도의 새로운 축
조용한 ‘정치 내조’ 벗어나 노동당 장악하고 권력 구축에 적극적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최고 권력자 곁에는 숨은 실세가 있기 마련이다. 이들을 ‘문고리 권력’이라고 부른다.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돼 있는 북한도 예외는 아니다. 김정은과의 가까운 거리를 이용해 권력을 휘두르는 인물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김정은 총비서의 이름을 팔아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인물은 북한에서 딱 한 명뿐이다. 바로 김여정이다. 전 세계가 ‘김주애’로 알려진 김정은의 딸에 주목할 때, 필자는 여전히 김여정에 주목한다.

물론, 김여정이 노동당 총비서, 혹은 국무위원장에 오를 가능성은 없다. 그러나 그녀는 예나 지금이나 평양 문고리 권력의 최고봉으로 군림하고 있다. 최근에는 김정은을 대신해 대남 강경 메시지를 연일 내놓으며 ‘김정은의 입’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8년 4월 27일 열린 2018 남북정상회담에서 자리에 앉고 있다. 오른쪽은 김여정 당 중앙위 제1부부장. [연합뉴스]
시계를 돌려 2011년 12월 17일로 돌아가 보자. 당시 김정일이 사망한 사실이 외부에 알려진 건 이틀이 지나서였다. 국정원에서도 관련 소식을 모를 정도로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이틀 뒤 김정일 사망 소식이 퍼지면서 세계는 북한에서 일어날 대변화에 주목했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베트남처럼 개혁·개방의 길로 갈 거라고 전망했다. 자연스레 20대 후반의 청년 ‘김정은’에게 세간의 관심이 모아졌다. 미국과 유럽의 외교안보 싱크탱크들은 스위스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20대 청년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쇄국정책에 마침표를 찍을 것이란 희망 섞인 관측을 내놓았다.

예측은 전부 빗나갔다. 그는 김일성의 이민위천 사상, 김정일의 선군 사상을 이어갔다. 김일성-김정일주의를 선언한 김정은은 노동당 중심의 국가 운영을 천명했다. 필자는 당시 평양에서 3대 세습을 목도했다.

서방과 외신들이 청년 김정은에게 주목할 때 필자는 김정일에 주목했다. 사망한 김정일에게 주목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김정일 사망 직후 평양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김정일이 써놓은 각본대로 진행됐다. 김정은 집권 직후 벌어진 대다수의 굵직한 결정들은 이미 김정일이 죽기 전에 만들어둔 각본에 담겨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바로 2011년 초 ‘흥남 비료공장 현지 시찰’이다. 북한 당국은 김정일과 김정은의 흥남 비료공장 현지 시찰 사진을 노동당 부부장급 이상 간부진에 배포했다. 김정은과 김정일을 한 장의 사진에 담아, 앞으로 벌어질 3대 세습을 암시한 것이다.

동시에 김정일은 ‘김여정 카드’를 준비했다. 김여정 없이는 김정은이 자립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한 것이다. 즉, 서방에서 북한 개혁·개방을 이야기할 때, 평양에선 대다수가 3대 세습을 떠올렸다. 실제로 김정은은 김정일과 별반 다르지 않은 길을 걷고 있다. 어느덧 40대 초반의 중년이 된 그는, ‘공화국 수반’의 지위를 다졌다. ‘총비서동지’의 지위에 오르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김여정은 그 사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문고리 권력으로 자리매김했다.



애도기간 직후 비밀리에 이뤄진 인사이동

여전히 서방에선 김여정이 정확히 언제 노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에 올랐는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공식적으로 부부장 지위를 달고 대외행보를 한 것은 2014년이나, 김여정은 사실 2012년 초에 부부장에 임명됐다. 김정은 세습 직후다. 김정일 애도기간이 끝나자 조용히 김여정을 부부장에 임명했다. 김여정을 선전선동부 부부장에 임명한 것은 노동당 내 지지 기반이 부족했던 김정은의 말 못할 고뇌를 암시한다.

이와 관련해서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 2012년 1월 초, 추운 겨울 어느 날이었다. 노동당 선전선동부 고위 인사가 외무성 요원들과 회식 자리를 가졌다. 당시 그는 김여정 관련 언급을 했다. 구체적으로는 “최근 김여정이 사용할 당 사무실을 새로 꾸리느라 바쁘다. 어려움이 많다”는 넋두리였다. 내색하진 않았으나, 외무성 요원들은 김여정이 숨은 실세가 되리란 것을 직감했다.

다시 김정일 사망 직후로 돌아가보자. 김정일 사직후, 북한 전역에는 애도기간이 선포됐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정신없을 김정은은 김여정을 선전선동부 부부장에 임명한 직후, 각종 만행을 일삼는다. 고모부인 장성택을 고사포로 처형(2013년 12월)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오로지 자신의 세습을 공고히 하기 위함이었다.

평양 내 기반이 약한 김정은은 당과 군부 내 원로들을 견제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그 사이 여동생 김여정은 조용히 노동당에서 권력을 빠르게 키워 나갔다.

당시 노동당에선 김여정을 위한 각종 행사를 마련하기도 했다. 김정일 사망 시기를 전후해 대외적 이미지 쇄신을 위한 주체사상세계대회를 개최한 것이 대표적이다. 당시 북한은 사상대회를 국제적 행사로 격상하고 실행에 옮겼다. 2012년 4월에 성대하게 열린 주체사상세계대회를 계기로 김여정의 노동당 내 정치행보가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당시 김여정은 ‘성과적 보장’을 명목으로 현지 시찰에 나서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2월 10일 오전 청와대를 방문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과 접견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선전선동부의 격상, 군사부의 몰락

김여정은 후계자 수업 기간이 짧았던 김정은의 정치적 공백을 메웠다. 김정일의 경우 세습 전 노동당 선전선동부에서 근무하며 정치적 기반을 다질 기회가 있었지만, 김정은은 그렇지 못했다. 세습 전까지 평양에서 정치적 직함을 받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를 상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 김여정이었다.

이처럼 김정은에게 김여정은 여동생 이상의 의미가 있다. 김정은에게 김여정은 ‘제1의 혁명동지’다. 여성이 ‘총비서동지’가 되는 것이 불가능한 북한 특성상, 김여정은 김정은의 경쟁 상대가 아니다.

김정은은 혁명동지 김여정을 위해 노동당 내 선전선동부 지위를 강화했다. 다만, 빠르게 강화한 탓에 뒷말이 무성했다. 당시 평양에선 “유일사상 체계 확립과 위대성 선전을 빌미로 공화국(북한) 모든 요원을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선전선동부가 장악하고 있다”는 불만이 횡행했다. 김여정이 실권을 잡은 노동당 선전선동부의 위상은 역사상 최대로 격상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김정일은 사망 직전 아들(김정은)을 위해 노동당 군사부를 축소해 기존 군부 세력의 노동당 내 영향력을 제한했다. 북한 특성상, 군부가 당에 대한 통제력을 쥐는 순간, 20대 청년(김정은)을 날리는 것은 시간문제이기 때문이다. 과거 노동당 군사부는 〈군사분야에 대한 당적지도〉를 명분으로 육·해·공군뿐 아니라 군부 내 교육기관의 모든 업무에 간섭했다. 그러나 김정일은 말년에 자신의 선군 정치와는 상반된 조치를 취한다. 노동당 군사부 요원들을 인민무력성 등 현장 부대에 재임명하는 방식으로 정원을 대폭 감축한 것이다. 2025년 오늘날 노동당 군사부는 극소수의 요원들로 구성된 무의미한 부처로 전락했다.

사진은 무릎을 굽힌 채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보고하는 조용원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조 제1부부장은 김정은 위원장의 측근으로 꼽힌다. [조선중앙TV=연합뉴스]
다시 ‘문고리 권력’ 김여정 이야기로 돌아와보자. 2인자는 약해 보여야 한다. 1인자를 넘어서는 강인함과 리더십은 반감을 부르기 때문이다. 전 세계 문고리 권력들이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수면 아래서 은밀히 활동하는 이유다. 초창기 김여정의 행보가 그러했다. 과거 김여정은 지금의 강인한 이미지와 달리, 선대에 대한 깊은 충성심을 지닌 인물로 북한 전역에 소개됐다. 김여정의 첫 정치행보가 김일성·김정일의 동상이 건립된 만수대 언덕에서 시작한 이유다.

2012년 초 겨울로 기억한다. 당시 김여정은 인민들과 주체사상세계대회 참가자들에게 자신의 충성심을 보여주기 위한 ‘데뷔 쇼’를 기획했다. 심지어 김여정은 원로들이 김일성·김정일 동상에 꽃바구니를 들고 증정하는 사전 훈련을 지도했다. 젊은 여성이 백발이 성성한 원로들을 훈시하는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줄과 열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높은 언덕의 계단을 차례로 오르는 원로들을 김여정은 웃음을 머금고 바라봤다.



숨은 실세에서 권력 2인자로

초반에는 시종일관 자세를 낮춰 영향력을 키워간 김여정은 김정일 사망(2011년) 10년째인 2021년 국무위원회 위원이라는 ‘이중 신분’을 부여받는다. 북한에선 이중적 신분을 부여하는 게 일반적이다. 필자도 탈북 직전까지 ‘외무성 부원 겸 사회과학원 사회과학자협회 아프리카 담당 집행서기’라는 이중 신분을 갖고 있었다. 직급이 높을수록 친선협회 회장이나 위원회 위원장 등 비상설 조직의 수장을 겸한다. 단일 직책에 익숙한 한국에선 보기 어려운 모습이다.

백두혈통 하나만으로도 이미 강력한 지위를 누리는 김여정에게 굳이 이중 신분을 부여하는 이유는 업무 영역을 확대하기 위해서다. 동시에 아직 젊고 어리숙한 김정은의 한계를 극복하고 기득권층과의 격차를 줄여 위상을 제고하려는 의도도 숨어 있다.

이 밖에도 김정은은 김여정에게 다양한 업무를 맡겨 대내·외 사업에서 권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김여정이 오늘날 노동당 선전선동부의 업무를 초월한 대남·대외 분야에서 성명을 내놓게 된 배경이다. 과거 수면 아래에서 조용히 세를 키웠다면, 2020년을 변곡점으로 명실상부한 공화국 서열 2인자 자리를 굳히고 있는 것이다.

조용원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의 실권이 김여정으로 이전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김주애보다 김여정의 움직임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보도과 신설, 김여정 체제의 완성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로 북한의 대남 성명·담화에서 보이는 변화다. 과거 북한은 외무성·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등을 통해 대남 성명·담화를 발표했으나, 최근에는 김여정 명의로 입장을 내고 있다. 이는 대남 선전의 양상이 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남 업무 주체도 외무성 조국통일담당국·보고국에서 노동당 선전선동부 보도과로 이전됐다. 북한 외무성은 기존 산하 부처인 조국통일담당국도 해체한 상태다. 눈여겨볼 것은 북한이 조국통일담당국을 해체한 이후 노동당 선전부 산하에 보도과를 신설했다는 점이다. 김여정을 보좌하는 실무 조직이 강화됐다는 걸 뜻한다.

이전까지 북한에서는 노동당 통전부, 조평통, 인민무력성 대외사업부 등 대남·대외 관련 모든 보도자료를 외무성 보도국이 종합했다. 외무성 보도국은 유일한 보도 창구였다. 노동신문사·중앙통신사 등 주요 북한 매체들에 협조공문을 발송해 필요한 보도자료를 배포하거나 대남·대외 홍보용 인터뷰를 직접 조직(기획)하곤 했다.

그러나 김여정의 노동당 입성 후 변화가 생겼다. 외무성 보도국에서 노동당 선전선동부 보도과로 대내·외 보도 주관 부처가 바뀐 것이다. 현재 보도과 편제는 4명으로 유지된다고 한다. 이들은 김여정을 위시해 북한 내부 소식뿐 아니라, 대남·대외 분야 등 모든 영역에 대한 홍보의 폭을 확대했다. 노동당 선전부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함이다.

노동당 국제부의 기능과 역할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노동당 내 김여정의 입지가 점차 강화돼 당 선전선동부의 대외 업무영역이 확대되자, 당 국제부도 초창기에는 덩달아 역할이 확대됐다. 2021년 열린 8차 당 대회에서 국제부의 수장 직급을 ‘비서’가 아닌 ‘부장’으로 결정한 것도, 김여정이 속한 선전선동부와 급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과거 당 국제부는 전 세계 각국 정당들과의 정치·외교를 사명으로 하는 당 주도의 대외채널이었다. 당 국제부는 북한의 정치·경제 환경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했지만, 업무영역의 한계로 국가차원의 대외정책 결정과정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그러나 김정은이 집권하면서 당 국제부는 2010년대 후반까지 외무성의 영역을 차츰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당 국제부는 외무성을 견제하기 위해 김정은 구두보고 라인까지 새로 구축했다. 앞서 외무성에는 이미 김정은에게 직접 보고할 수 있는 서류보고 라인이 구축돼 있었다.

그러나 김정은-김여정과 친밀도가 높은 리수용 전 주스위스 북한대사가 노동당 국제부 수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김정은 구두보고 라인에 변화가 생겼다. 지난 2019년 하노이 ‘노딜’ 이후 사기가 한풀 꺾였으나, 여전히 노동당 국제부는 막강한 권한을 지닌 부서로 남아 있다(〈월간중앙〉 7월호 ‘최고 존엄’에 걸려온 두 통의 부재중 전화… 김계관과 최선희 운명 갈랐다 참고).

최근 김여정의 정치행보를 보면 그녀의 정책결정 참여 수준이 어디까지인지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지난 2018년 2월 김정은의 특사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한 김여정은 북한에선 각종 군부대도 시찰하는 모습을 공개적으로 선전한다. 공격적인 정치행보를 이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선전선동부 역할을 뛰어넘어 노동당 내 세력 확보에 전력을 다하는 모습이다.

김여정이 이처럼 노동당 내 세력 강화에 주력하는 이유는 차세대 이너서클을 조성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김정은 체제는 오랜 기간 지속될 것이다. 일각에서 ‘김정은 건강 이상설’과 ‘김주애 4대 세습’을 주장하지만, 가능성은 희박하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여동생 김여정과 함께 미래 10년 경제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평양 시내 ‘뉴타운’ 지구 중 하나인 화성지구 3단계 준공식.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생존을 위한 동지에서 미래를 설계하는 실세로

김정은과 김여정의 공동 행보는 김정일 사망 후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지금 이들은 앞으로 다가올 10년(2025~2035년)의 새 판을 짜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김여정과 함께 노동당에서 근무하며 인연을 맺은 엘리트 요원이 차세대 ‘공화국’의 핵심 직책에 발탁될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김정은과 김여정을 떠받치는 정치 세력으로 성장할 것이다.

김정은 주위에는 여전히 조용원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등 측근들이 그를 옹위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고령이다. 김정은 입장에선 조용원과 10여년 뒤 미래 사업을 논하기에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차세대 핵심 이너서클이 필요한 이유다.

현재 김여정은 조용원과 함께 쌍두마차로 북한 노동당을 떠받들고 있지만 조용원의 실권이 김여정으로 이전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우리가 김주애보다 김여정의 움직임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한진명 김일성종합대학 불어과 졸업. 북한 외무성 6국(아프리카·중동·라틴아메리카 담당국)과 7국(주체사상 대외선전국), 주베트남 북한대사관 3등서기관으로 근무하다가 2015년 1월 외교 경로를 통해 한국으로 망명했다.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을 나와 공장 근로자로 생활하고 있다.


한진명 前 주베트남 북한 서기관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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