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정부 핵심 관계자는 한국의 3500억 달러(약 490조원) 대미(對美) 투자와 관련해 이렇게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5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일본에서 5500억 달러, 한국에서 3500억 달러를 받게 됐다. 그것은 선불(up front)”이라고 한 말을 언급하면서다.
이 관계자는 “미국에서 3500억 달러를 ‘현금으로 내라’, ‘빨리 내라’며 사실상 ‘선불’을 요구해왔다. 그래서 이재명 대통령이 ‘탄핵’까지 언급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8일 공개된 시사 잡지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그것(미국의 협상 요구)을 받아들였다면 탄핵당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은 지난 7월 무역 합의 당시 3500억 달러의 대부분을 직접 지분 투자 방식이 아닌 대출과 보증 형식으로 투자하는 걸로 파악했다.
이 관계자의 설명을 종합하면, 미국이 최근 실무 차원에서 한국에 3500억 달러 ‘선불’ 요구를 해왔는데, 한국이 버티자 트럼프가 ‘선불’을 수면 위로 올리며 한국을 압박하는 상황인 것이다. 특히 트럼프가 선불을 언급한 시점도 주목받고 있다. 유엔총회 참석차 미국 뉴욕을 방문했던 이 대통령의 귀국행 비행기가 이륙한 직후에 선불 발언이 나왔다는 점에서 트럼프의 계산된 압박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게다가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은 한국 측에 당초 합의액 3500억 달러보다 투자 액수를 더 늘리라고 압박하고 있다고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보도했다. 러트닉 장관의 요구는 일본이 약속한 5500억 달러에 근접하는 수준이라고 한다. 미국 측 협상 관계자는 한국의 투자액이 일본 수준으로 근접할 가능성은 작지만, 일본이 합의한 많은 조건을 한국이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WSJ는 전했다.
특히, 한국과의 무역 협상 결과는 미국이 수십 개 국가와 관세 협상을 진행하는 데 중요한 지표가 된다고 WSJ는 강조했다. 미국이 한국과 협상에서 얼마나 이끌어내느냐에 따라 향후 다른 국가와의 무역 협상 결과도 영향을 받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미국이 한국을 더 강하게 압박하는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미국의 선불과 증액, 두 가지 압박 카드에 26일 오후 귀국하는 이 대통령의 고심은 더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강공에 미국이 더 큰 압박으로 받아친 모양새여서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뉴욕 현지에서 “무제한 통화스와프는 필요조건”, “투자 패키지가 경제적·상업적 합리성이 담보돼야 한다”며 국익을 고려해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오히려 트럼프가 선불 카드를 공식화하면서 한·미 양국의 긴장도는 더 높아진 상황이다.
이 때문에 교착 상태는 쉽게 풀리지 않을 전망이다. 대통령실은 트럼프가 참석하는 다음달 말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한·미 무역 협상 진전의 주요 계기로 만들 계획이다. 하지만 이러한 계획이 외려 한국에 부담이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국까지 온 트럼프가 빈 손으로 다시 돌아갈 경우 한국 역시 후폭풍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이 대통령은 25일(현지시간)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열린 ‘대한민국 투자 서밋’ 행사를 마친 뒤 페이스북을 통해 “연내 MSCI(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 선진국 지수 편입을 위한 종합적 로드맵을 발표하는 등 우리 자본 시장에 투자하는 전 세계 투자자들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걱정하지 않고, ‘코리아 프리미엄’을 누릴 수 있도록 각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 국내 외환시장을 24시간 개장하고 역외 원화 결제 시스템을 구축하는 내용이다.
이런 방향의 개편책이 한국이 미국에 요구하는 무제한 통화스와프 협정 체결을 위한 사전 작업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미국은 통화스와프 협정을 기축통화국이거나 외환시장이 24시간 개방된 국가와만 맺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