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관세 협상이 ‘3500억 달러(약 490조원) 대미 투자 패키지’를 놓고 최대 고비를 맞았다. 한국은 미국 관세 인하를 위해 3500억 달러 투자를 약속했지만, ①투자 구조(현금 vs 보증) ②무제한 통화스와프(필요조건) ③투자 배분(상업적 합리성) 등 3대 쟁점에서 이견이 이어지며 교착 상태다.
트럼프 대통령은 25일(현지시간) “한국에서 3500억 달러를 받는다. 그것은 선불(up front)”이라고 언급했다. 같은 날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이 한국에 “투자금 소폭 증액”을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이 매체에 따르면 러트닉 장관은 한국이 지난 7월 말 합의한 3500억 달러를 일부 증액해 일본의 5500억 달러 약속에 더 가깝게 맞출 것을 제안했다.
러트닉 장관은 또 투자금 상당액을 단순 보증이나 대출이 아닌 현금 지분 투자로 집행하라는 입장을 비공식적으로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이 일본보다 완화된 조건으로 미국과 합의할 경우, 법적 구속력이 없는 MOU(양해각서) 형태인 미·일 협정이 흔들릴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다만 한국 통상당국은 이같은 주장을 부인하고 있다.
일본은 이달 초 미국과 협상에서 5500억 달러를 대부분 현금으로 제공하는 이른바 ‘백지수표’ 방식에 합의했다. 투자 대상 결정권도 사실상 미국에 넘겼으며, 수익 배분도 원금 회수 전 5대5, 이후에는 미국이 90%, 일본이 10%로 갖기로 합의했다. 한국 정부가 일본식 모델을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외환시장 충격은 불가피하다는 우려가 나온다.
한국은 이런 요구를 수용한다면 무제한 통화스와프가 전제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통화스와프는 두 나라 중앙은행이 서로의 통화를 맞바꾸고 필요할 때 다시 되돌려주는 계약으로 일종의 ‘외환 안전망’인 셈이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지난 24일 뉴욕에서 “미국이 전달한 MOU 초안이 우리의 이해와 판이하게 달랐다”며 “무제한 통화스와프는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라고 강조했다. 앞서 이재명 대통령은 22일 로이터와 인터뷰에서 "(한미 간) 통화 스와프 없이 미국 요구 방식으로 3500억 달러를 인출해 전액 현금으로 투자한다면 한국은 1997년 금융위기와 같은 상황에 직면할 것"이라고 했다.
3500억 달러는 한국 외화보유액(4100억 달러)의 84%에 달한다, 환율 안전장치 없이는 협상 타결이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미국이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 한국은 협상 자체를 타결하기 어렵다며 일종의 ‘레드라인’을 긋고 있다. 이날 로이터는 시티그룹의 분석을 인용해 ”미국이 한국은행과 연준 간의 무제한 스와프 라인을 수용할 가능성이 낮다”며 “미 연준은 대신 미국 국채를 담보로 한 유동성 조치인 피마 레포 제도(FIMA repo facility)를 권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피마 레포 제도는 미국 연준에 계좌를 보유한 해외 통화당국이 보유 중인 미국 국채를 담보로 맡기고 달러를 빌린 뒤, 일정 기간 후 국채를 다시 사들이는 방식이다. 통화스와프 라인을 갖지 못한 국가가 위기 시 달러를 빌릴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망을 제공하는 조치인데, 2020년 코로나19 직후 처음 도입됐지만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투자 수익 배분 문제도 난제다. 이재명 대통령은 24일 스콧 베센트 미 재무장관과의 면담에서 “상업적 합리성을 바탕으로 양국 모두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논의가 진전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상업적 합리성’이란 수익 배분 문제를 언급한 것으로 풀이된다. 미국은 투자 이익을 미국 90%, 한국 10%로 나누자는 방안을 고수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이런 방식은 미국에 일방적으로 유리하다는 입장이다. 최소한 원금 회수 전까지는 한국 90%(미국 10%)를 주장하며 맞서고 있다. 여기에 투자 손실 발생 시 책임 소재도 불투명하다. 한국은 손실 전가를 막기 위해 미 정부 보증을 요구하지만, 미국이 이를 수용할지는 미지수다.
전문가들은 미국의 요구대로라면 한국이 일방적으로 자금만 내고 투자처 결정권이나 이익 배분 권한은 사실상 박탈당하는 구조라고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시간을 지체할수록 불리해지는 쪽은 한국이다. 최근 미국은 일본·EU와 합의한 자동차 관세 인하(25%→15%)를 공식 발효했다. 일본·EU 기업과 경쟁하는 한국 자동차 업계의 부담은 더 커질 수 있다. 대미 협상의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주식 시장도 충격을 받고 있다. 이날 코스피는 전날보다 2.45%(85.08포인트) 내린 3386.03로 9거래일 만에 3400선이 무너졌다.
한국 정부는 다음 달 말 경북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 전후로 협상 타결 목표를 정했다. 대통령실은 “시한 때문에 원칙을 훼손하는 합의는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지만, 이재명 정부의 협상력이 시험대에 올랐다는 지적이다. 이재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 교수는 “현재 한·미 간 입장차가 너무 커 단기간에 이를 풀어낼 해법이 보이지 않는다”며 “APEC 정상회담 전까지 타결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고, 최소 수 주간 심도 있는 협상이 진행돼야 할 것 같다”고 강조했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한국 정부는 트럼프 대통령을 직접 설득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판단해 장관·의회 등 주변 채널을 통해 한국의 입장을 알리고 우회적으로 압박을 낮추려는 전략을 취하는 것을 보인다”며 “일본의 합의로 미국이 한국에 더 강한 요구를 하는 상황이며, 한국도 추가적인 ‘명분’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