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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10m 사이에 두고 벌어진 촌극…괴물 태풍 '대만 정계' 덮쳤다

중앙일보

2025.09.26 00:23 2025.09.26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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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라이칭더 대만 총통이 태풍 라가사에 큰 피해를 입은 화롄현을 방문해 주민들을 위로했다. 사진 대만 총통부 홈페이지 캡처
“직접 만나 말씀하시는 줄 알았는데요.”
“지금 회의 중이라서요. 죄송합니다.”

초강력 태풍 제18호 ‘라가사’가 휩쓸고 간 대만에서 후폭풍이 거세다. 호수가 범람해 최소 14명이 숨지는 참사가 발생하자 책임 소재를 두고 정치권에서 공방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각기 다른 정당 소속인 라이칭더(賴清德) 총통과 쉬전웨이(徐榛蔚) 화롄현 현장 사이의 신경전도 벌어졌다.

25일 대만 매체들에 따르면 이날 라이 총통은 대만 동부 화롄현광푸향을 찾았다. 산악지대의 언색호(barrier lake)가 범람하면서 최소 14명이 숨지고 14명이 행방불명된 곳이다. 폭우로 발생한 산사태로 형성된 이 호수엔 수영장 약 3만6000개를 채울 수 있는 9100만t의 물을 가두고 있었다.

화롄현에 도착한 라이 총통은 지역책임자인 쉬 현장을 만날 수 없었다. 여러 차례 행방을 물은 뒤에야 다른 장소에서 회의 중인 쉬 현장과 전화통화를 할 수 있었다. 라이 총통은 “어떤 도움이 필요하느냐”고 물은 뒤 “정부는 화롄현을 강력히 지원하면서 화롄현주민들과 함께 할 것”이라고 말했다.

쉬 현장은 라이 총통에 “회의를 주재 중이고 기자회견도 예정돼 있어 당장 이동하기 어렵다”면서 “예산 문제가 있기 때문에 정부 차원에서 인력과 장비를 충원해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태풍 라가사 피해 대책에 관해 논의하는 쉬전웨이 대만 화롄현 현장. 사진 화롄현 정부 홈페이지 캡처
라이 총통은 통화 직후 취재진에 “화롄현이 도움을 요청한다면 대만 전체가 돕고 나설 것”이라면서도 “현 정부에서 먼저 요청해야 정부가 적절한 지원을 제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재난 관련 정보는 정확해야 한다”면서 “지속적으로 바뀌어선 안 된다”고 꼬집었다. 사망자와 실종자 수에 혼선을 빚은 화롄현을 향한 질타다. 참사 이후 화롄현이 발표한 사망자(2명→17명→14명)와 실종자(30명→124명→152명→17명) 수는 수차례 바뀌었다.

당시 라이 총통과 쉬 현장은 고작 10m 떨어진 건물에 각각 머물고 있었다고 대만 매체들은 보도했다. 서로를 지척에 두고도 ‘비대면 보고’를 한 건 참사 책임을 둘러싼 여야 간 공방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라이 총통은 친미·독립 성향의 민주진보당, 쉬 현장은 친중 성향의 국민당 소속이다.

태풍 라가사에 큰 피해를 겪은 대만 동부 화롄현 모습. 로이터=연합
참사 직후 민진당은 쉬 현장을 향해 공세를 퍼부었다. 관련 부처에서 제공한 9건의 태풍 관련 적색경보를 무시했다는 주장이다. 화롄현의 부실 대응이 인명 피해를 키웠다는 논리를 폈다. 쉬 현장 측은 “과장된 주장”이라며 “중앙 정부 지침에 따라 조처를 했다”고 밝혔다. 화롄현의 모든 조치는 공식 기록으로 남아있다는 해명도 덧붙였다.

반대로 민진당은 참사 책임을 화롄현으로 돌리려고 시도하려는 듯한 대화 내용이 유출되며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였다. 한 의원이 동료들에게 “모든 사망자가 의무 대피 구역에서 발생했다는 점을 강조하라”고 말한 것이다. 국민당 측은 “참사 속에서도 민진당은 야당을 공격할 방법만 연구하고 있다”면서 “냉혈하고 비인도적인 행위”라고 맹공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구조대원들이 생존자를 찾기 위해 진흙과 잔해를 파헤치는 순간에도 정치적 폭풍은 이어지고 있다”면서 “정치인들이 모욕적 언사를 주고받는 동안 주민들의 고립감은 더욱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도성([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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