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십리에서 무, 살곶이다리에서 순무, 석교에서 가지·오이·수박, 연희궁에서 고추·마늘·부추·해채, 청파에서 미나리, 이태인에서 토란 같은 것들이 나오는데 (중략) 모두 엄씨의 똥을 써서 잘 가꾸어 내는 것이다."
18세기 연암 박지원이 쓴 소설 『예덕선생전』의 한 대목이다. 서울에서도 교통의 요지로 번화한 요즘과 달리 조선시대 광희문 바깥의 왕십리는 밭작물을 재배하던 농경지가, 그리고 공동묘지가 있던 곳이다. 도성 안에 묘를 쓸 수 없던 당시에는 서울 동쪽의 왕십리 일대와 서쪽의 아현동 일대에 각각 묘지를 조성했고, 광희문은 서쪽의 소의문(서소문)과 더불어 '시구문'이라고도 불렸다. 시신이, 다시 말해 장례 행렬이 나가는 문이라는 뜻이다.
국문학자 이병기는 1928년에 쓴 글에 "서울 부근에 광희문 밖처럼 쾌감을 주지 못하는 데는 없을 것이다. 다 먼지며 파리며 냄새며 묵은 무덤들에서 드러나는 해골 조각이며 쓰러져 가는 오막집 따위가 하나도 새롭고 깨끗한 맛은 없다"고 그 인상을 전했다. 그야말로 변두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은 이런 왕십리와 이런저런 인연이 있는 22명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병석에 누워 있다가 한국전쟁 와중에 지켜보는 이 없이 홀로 숨을 거둔 소설가 김동인, 왕십리에서 나고 자란 만담가 장소팔, 택견의 전통을 현대에 복원한 신한승, 해방 직후 선거 대결을 벌인 독립운동가 지청천과 김붕준, 영국 출신으로 조선의 풍경을 아름다운 작품으로 남긴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 등 다채롭다.
웬만한 남자보다 체격이 월등했던 무수리 고대수와 갑신정변, 아들을 구하러 나선 김장손과 임오군란 등 시대 흐름과 맞물린 인물들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지은이는 각자의 행적과 일화에 등장하는 곳이 지금의 어디쯤에 해당하는지 추적하며 지리적 입체감을 더하고, 때로는 소설 속 인물들까지 아울러 변두리 민초들의 삶과 시대 흐름에 초점을 맞춘다. 덩달아 근대 왕십리에 오물처리장이나 우시장이 있던 것도 전해진다. 전통적 역사 서술과는 다른 방식으로 재미와 지식을 고루 안겨주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