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개그맨의 시작, '개콘'의 시초…전유성, '개그계 대부' 아깝지 않은 이유 [핫피플]

OSEN

2025.09.26 02:30

  • 글자크기
  • 인쇄
  • 공유
글자 크기 조절
기사 공유
[OSEN=사진팀] 25일 폐기흉 증세 악화로 세상을 떠난 개그맨 전유성의 빈소가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됐다. 향년 76세.발인은 28일 진행되며 장례는 희극인장으로 치뤄진다. /photo@osen.co.kr<사진=사진공동취재단>

[OSEN=사진팀] 25일 폐기흉 증세 악화로 세상을 떠난 개그맨 전유성의 빈소가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됐다. 향년 76세.발인은 28일 진행되며 장례는 희극인장으로 치뤄진다. /[email protected] <사진=사진공동취재단>


[OSEN=장우영 기자] 개그맨이라는 단어의 시작이자 ‘개그콘서트’의 시초, 개그의 대중화에 앞장섰던 故 전유성이 하늘의 별이 됐다. 모두가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고 있는 것만 봐도 故 전유성이 얼마나 우리의 삶에 깊숙하게 들어와있고, 영향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다.

1949년생으로 올해 76세인 전유성은 단순한 개그맨을 넘어 방송 작가, 공연 기획자, 영화 감독 등 다방면에서 독보적인 족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서라벌예술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한 뒤 당대 최고 MC였던 곽규석의 원고를 써주는 코미디 작가로 연예계에 첫 발을 내디딘 전유성은 1970년대 TBC 인기 쇼 프로그램 ‘쇼쇼쇼’ 대본을 쓰며 작가로서 명성을 쌓았다.

그의 업적 중 가장 큰 업적은 ‘개그맨’이라는 단어를 정착시킨 것으로, ‘개그맨’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제안하고 대중화시키면서 ‘개그맨’은 미디 뿐만 아니라 창의적이고 재치있는 유머를 구사하는 새로운 형태의 희극인을 지칭하는 단어로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한국 코미디의 정체성을 확립한 전유성은 대학로 소극장에서 이뤄지던 개그를 방송화시키면서 ‘개그콘서트’, ‘웃음을 찾는 사람들’ 등이 탄생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개그콘서트’ 탄생에 일등공신으로 꼽힌 전유성은 1000회 특집 당시 “개콘의 터를 잡은 선조님”으로 소개를 받으며 영향력을 증명했다.

또한 아시아 최초의 코미디 페스티벌인 ‘부산국제코미디페스티벌’ 명예위원장을 맡아 한국 코미디를 세계에 알리는 데 힘썼으며, 2007년 경상북도 청도에 국내 최초의 코미디 전용 극장 ‘철가방 극장’을 설립했다.

슬랩스틱이 유행하던 시절에도 자신만의 개그를 이어오며 색다른 웃음을 선사하기도 했다. 전유성의 개그는 이른바 ‘슬로우 개그’, ‘지적인 개그’로 불리며 한 번 더 생각해야 웃음이 터지는 방식이었다. 당대 유행하던 개그와는 차별화된 자신만의 길을 걸어온 그였던 만큼 ‘개그계 아이디어 뱅크’로 불렸고, 후배들의 코너에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하며 ‘정신적 지주’로 영향력을 끼쳤다.

사람 보는 안목도 뛰어나 수많은 인재를 발굴하기도 했다. 20대 시절 이미 이문세, 주병진 등을 발굴했으며, 가수 김현식을 알아보고 가수로 나가길 권유했던 것으로도 유명한 전유성은 예원예술대학교의 코미디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조세호, 김신영 등을 제자로 키워냈다. 전유성의 영향력에 대해 김학래는 전유성에 대해 “코미디언 선배. 단어를 그분이 만들어냈다. 전유성 선배다. 평생을 근 50년 다 되가는 개그맨 생활을 제대로 갈 수 있게 도와줬다”고 말할 정도.

수많은 업적과 후배 양성 등을 통해 영향력을 보여왔던 전유성이었던 만큼 그의 사망 소식에 많은 이들이 애도하고 있다. ‘부산국제코미디페스티벌’ 측을 비롯해 양희은, 조혜련, 이경실, 박준형, 김대범, 김영철, 서유정, 김신영, 김영희, 조세호 등이 소셜 미디어 계정에 추모하는 글을 남겼고, 많은 개그맨들이 빈소를 찾아 오열하며 진심으로 슬퍼했다.

故 전유성의 발인은 오는 28일 오전 7시 엄수된다. /[email protected]


장우영([email protected])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