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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시선] 우크라이나 바라보는 유럽의 속내

연합뉴스

2025.09.26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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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시선] 우크라이나 바라보는 유럽의 속내

(베를린=연합뉴스) 김계연 특파원 = 1945년 5월 7일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 참모장 알프레트 요들은 프랑스 랭스의 연합군 사령부에서 무조건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베를린은 닷새 전 함락됐고 아돌프 히틀러는 이미 지하 벙커에서 목숨을 끊었다.
독일군은 이튿날 밤 베를린에서 또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베를린을 점령한 소련군이 서부전선에서 서방 연합군 주도로 받은 항복에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빌헬름 카이텔 최고사령부 총장과 공군·해군 사령관이 불려 나갔다. 요들과 카이텔은 이듬해 처형됐다.
전쟁사에서 휴전 없이 곧바로 종전한 사례는 종종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처럼 패망을 피할 길 없는 쪽이 조건 없이 항복하는 경우다. 교착 상태라면 양측이 전쟁을 끝낼 필요성을 인정하고 신뢰를 확인하는 휴전이 종전의 발판이다. 휴전도 쉽지는 않다. 한국전쟁 때는 유엔군과 공산군이 2년간 100번 넘게 협상해 겨우 종전 아닌 정전에 합의했다.
유럽 정상들은 지난달 15일 미국·러시아 정상회담 직전까지 무조건 휴전을 주장했다. 그러나 회담 이후 휴전 없이 종전으로 직행하겠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말에 별다른 반박 없이 감사하다고 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국제사회의 휴전 압박에서 벗어났다.
대부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 유럽연합(EU) 회원국으로 이뤄진 '의지의 연합'은 연일 회의를 열었다. 이 모임을 주도한다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26개국이 우크라이나 안전보장군에 참여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파병 의사를 확인한 나라는 서너 개 정도다. 푸틴이 트럼프와 알래스카 회담에서 나토 집단방위와 비슷한 우크라이나 안전보장에 동의했다는 서방 언론보도가 나온 뒤에 벌어진 일이다.

그러나 푸틴이 유럽 군대의 우크라이나 주둔에 동의했을 가능성은 '0'(제로)에 가깝다. 우크라이나 분쟁의 근본 원인으로 주장해온 나토의 안보 위협을 용인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2022년 개전 직후 평화협상에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과 튀르키예 등이 참여하는 안전보장 방안을 제시했다. 이 입장은 알래스카 회담 이후에도 바뀌지 않았다. 유럽이 어떤 안전보장안을 만들더라도 전쟁 당사국인 러시아가 동의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유럽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정상회담을 어디서 열지를 두고 부산했다. 푸틴이 2주 안에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만나기로 했다는 트럼프의 전언을 듣고 나서다. 그러다가 푸틴이 젤렌스키와 회담을 걷어차자 '최악의 전범', '포식자', '식인 괴물'이라고 비난했다.
푸틴이 젤렌스키를 당장 만나겠다고 약속했을 가능성도 희박하다. 푸틴은 전쟁 이전에도 슬랩스틱 코미디언 출신 젤렌스키를 외교적 대화 상대로 대우하지 않았다. 만날 수는 있지만 휴전 또는 종전안이 마련된 뒤 최종 서명 단계에서나 가능하다는 게 일관된 입장이다. 정상회담 약속은 '2주'를 유난히 좋아하는 트럼프의 허풍 또는 전략이었을 것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입장이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상황에서 양국 정상이 만난들 어떤 합의가 이뤄질 리도 없다.
트럼프 당선 이전 유럽에서는 우크라이나 영토를 한 뼘도 내줘선 안 된다며 푸틴과 협상 자체를 사실상 금기로 여겼다. 지금은 우크라이나 분쟁 해결에 방해만 된다는 러시아의 핀잔에도 '우크라이나 안보는 유럽의 안보'라는 논리로 협상에 끼워달라고 요구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매일 군인 수백 명씩 죽어 나가는 전선 상황은 별다른 차이가 없다.

유럽의 속내는 복잡하다. 갈피를 못 잡고 트럼프와 푸틴에 끌려다니는 이유다. 유럽은 러시아가 몇 년 안에 유럽 나토 회원국을 침공할 거라고 주장한다. 우크라이나를 갈아 넣어 전쟁을 더 끌고 러시아의 군사·경제력을 소모시키는 게 유럽 침공을 조금이라도 늦추는 방법이다. 그사이 군수산업에 돈을 풀어 망가진 경제를 되살릴 수도 있다. 하지만 전쟁 피로감을 틈타 정권을 위협하는 극우 정치세력을 마냥 무시하기도 어렵다.
우크라이나에는 카드가 없다고 타박하던 트럼프는 지난 23일 돌연 빼앗긴 영토를 전부 되찾을 수 있다고 발언했다. 트럼프가 180도 바뀌자 유럽은 혼돈에 빠졌다. 카야 칼라스 유럽연합(EU) 외교안보 고위대표는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면서 트럼프의 모든 발언이 옳다고 말했다. 그러나 25일에는 "살상을 멈추겠다고 약속한 건 그(트럼프)였다"며 유럽이 부담을 전부 떠안을 수는 없다고 했다. 트럼프의 속셈을 알아차린 것이다.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인 존 미어샤이머 시카고대 석좌교수는 알래스카 회담 당시 "트럼프는 전쟁의 책임을 유럽과 우크라이나에 넘기길 원한다"며 "이 문제는 전장에서 해결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유럽은 이미 러시아산 에너지를 미국산으로 대체하고 트럼프가 끊은 전쟁비용도 전부 떠안았다. 이 틈에 러시아가 본격화한 회색지대 전략에 단결을 외치는 것 말고는 별다른 카드가 보이지 않는다. 묶어놓은 러시아 자산으로 전쟁비용을 조금 줄일 수는 있다. 합판과 스티로폼으로 만든 러시아 드론을 쏘겠다고 F-16 전투기를 띄운 촌극이 유럽의 복잡한 속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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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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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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