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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남 신부 "정치도 종교도 그냥 삼키면 광신도…꼭꼭 씹어라" [창간 60년-종교 지도자를 만나다]

중앙일보

2025.10.01 13:00 2025.10.02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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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60년-종교 지도자를 만나다
(4)천주교 영성심리상담소장 홍성남 신부

지난달 22일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홍성남(71) 신부를 만났다. 그는 ‘영성심리상담의 고수’다. 홍 신부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홍성남신부님의톡쏘는영성심리’의 구독자는 6만2000명이다. 그런데 구독자가 무려 78개국에 포진돼 있다. 지구촌 곳곳에서 그의 톡 쏘는 ‘사이다 해법’에 지지를 보내고 있다. 상담소에서 마주 앉은 홍 신부에게 ‘상처와 치유’를 물었다. 그는 방황과 좌절, 치유와 구도의 여정인 자신의 삶을 놀랍도록 솔직하게 꺼내 놓았다.

 홍성남 신부는 "나에게 영성심리 상담은 일종의 고해성사였다. 내 안에 퇴적층처럼 쌓여 있는 트라우마를 끄집어 낼 때, 비로소 치유가 시작된다"고 말했다. 김종호 기자


Q : 한국 사회가 양 진영으로 갈라져서 몸살을 앓고 있다. 소통과 화합의 정치, 왜 힘든가.
A : “한국 사회가 갖고 있는 분열 현상은 ‘트라우마’ 때문이다.”


Q : 어떤 트라우마인가.
A : “우선 일제 강점기에 대한 트라우마다. 식민 지배 겪은 사람은 친일파냐, 아니냐를 따진다. 한국전쟁도 트라우마다. 빨갱이냐, 아니냐. 군부 독재 트라우마도 있다. 민주냐, 반민주냐. IMF(국제통화기금) 사태 트라우마도 있다. 그 기간에 돈을 잃은 사람과 번 사람이 있다. 가진 자냐, 없는 자냐. 이 네 가지 트라우마가 우리 사회에 내재해 있다. 그걸 건드리면 폭발해 버린다.”


Q : 크게 보면 한국의 역사이자 상처다. 아물지 않은 상처를 건드리면 덧나는 것과 비슷하다. 어떡해야 하나.
A : “트라우마는 치유가 필요하다. 치유가 되지 않으면 사람들이 선동에 쉽게 쉽게 넘어간다. 그러니까 음식을 먹을 때 꼭꼭 씹어 먹어야 한다.”


Q : 꼭꼭 씹어 먹어라, 무슨 뜻인가.
A : “사람에게 치아가 왜 있을까. 음식을 씹으라고 있는 거다. 그런데 음식을 씹지 않고, 그냥 삼키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의 마음에도 치아가 있다. 씹는다는 게 뭔가. 이건 왜 이럴까. 저건 왜 저럴까.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고, 궁리하는 거다. 그렇게 씹다 보면 뇌에 근육이 생긴다. 그럼 자기중심이 생기고, 부화뇌동에 안 넘어간다.”


Q : 안 씹고 그냥 삼키면 어찌 되나.
A : “스스로 만든 자기중심이 없다. 그러니까 선동에 넘어간다. 씹지 않고 그냥 삼키는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쉽게 적개심을 갖는다. 삼키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상대를 적대시한다. 심리학에서는 그걸 ‘치아 공격성’이라고 부른다.


Q : 치아 공격성, 근본적인 이유는 뭔가.
A : “주입식 교육 때문이다. 한 사회에 대화하는 문화가 있느냐, 싸우는 문화가 있느냐를 봐라. 그럼 안다. 우리는 나와 생각이 다르면 상대를 밟아버리려고 하지 않나. 주입식 교육 탓이 크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Q : 종교는 어떤 식인가.
A : “종교도 주입식은 곤란하다. 그냥 암기하면 안 된다. ‘이건 믿음이야, 믿음. 그러니까 그냥 믿어’ ‘안 믿어진다고? 그건 네 믿음이 약해서 그런 거야.’ 이런 식으로 종교를 믿으면 광신도가 나온다. 종교적 광신도, 정치적 광신도는 그렇게 나온다. 그렇게 음식을 씹지 않고 삼킨 이들이 진영 간 싸움에서 최전방 공격수가 된다.”

서울 명동대성당 앞에 선 홍성남 신부는 "학위를 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알기 위해 영성심리를 공부했다"고 말했다. 김종호 기자

홍성남 신부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자신이 사제가 된 이야기를 꺼냈다. “집안은 가톨릭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어머니는 오히려 무당을 찾아가 물었다. 어머니의 수양 언니가 무당이었다. 나는 장남인데 외로웠다. 친구 따라 성당에 갔는데 형, 누나가 많았다. 그래서 좋았다. 수녀님이 신부나 수사가 되면 어울리겠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신학대에 갔다. 그는 답을 얻으리라 기대했다. “하느님, 당신은 사랑이라고 하시면서, 지옥은 왜 만드셨나요?” 풀리지 않는 신학적 물음들. 그에 대한 답이 있으리라 기대했다. “신학대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후회했다.”


Q : 왜 후회했나.
A : “교수님들께 물어보면 상세하게 답을 해줄 줄 알았다. 그냥 주입식이더라. 한마디로 ‘종교 지도자 양성 사관학교’였다. 군대를 제대하고 갔는데, 또 군대였다. 나는 신학과 철학을 좋아했다. 그런데 수업은 암기식이었다. 너무 답답해서 숨 쉴 창이 필요했다. 그때 문고판 고전소설을 사서 다 읽었다.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등 닥치는 대로 읽었다.”

당시는 군사정권 시절이었다. 신학대에서 홍 신부는 운동권이었다. “가톨릭 성인전보다 체 게바라의 자서전을 더 열심히 읽었다. 해방신학에 빠졌다. 성경을 봐도 거부감이 들었다. 혁명을 하려면 무기가 있어야지, 사랑으로 무슨 혁명을 해? 그렇게 생각했다.” 시위에서 돌아온 날, 밤에는 달랐다. ‘독재 타도’를 목이 터지라 외치고 돌아오면, 가슴 저 밑바닥은 꺼진 듯이 공허했다.

졸업 후에 서울 잠실의 본당으로 갔다. 신부는 2명, 신자는 1만2000명이었다. “무지막지한 사랑을 받았다. 동시에 마음속 우울감도 더해갔다. 신자들은 거룩한 신부로 나를 대했다. 나의 내면은 그만큼 영성적이지도, 거룩하지도 않았다. 늘 두려움이 있었다. 진짜 나를 알면 다들 도망갈 텐데. 강론을 할 때도 그랬다. 아, 이거 나도 못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네. 어디 가서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혼자서 삭히고, 삭히고, 삭히다가 술에 빠졌다. 우울증도 왔다.”

홍성남 신부는 "어릴 적부터 효도해라, 바르게 살아라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신학생 때는 죄짓지 마라고 들었다. 이런 윤리 교육의 억압 속에서 컸다. 그런데 영성심리상담 대학원에 갔더니 나의 행복과 자기 실현을 이야기하더라. 내게는 거기가 천국이었다"고 말했다. 김종호 기자

마흔두 살 때였다. 홍 신부는 지방의 한 도시에서 강물 위, 인적 없는 다리 난간에 서 있었다. 뛰어내릴 참이었다. “그냥 무(無)로 돌아가고 싶었다. 처음부터 없었던 존재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럼 내가 남긴 발자국도 없어지겠지, 생각했다.” 그때 허공에서 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이렇게 끝낼 거냐?” 처음에는 환시인가, 환청인가 싶었다. 다시 뛰어내리려는데, 또 들렸다. “이렇게 끝낼 거야?”

홍 신부는 돌이켜 생각했다. “내 나이 마흔둘. 문득, 이렇게 끝내기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 무렵 한 후배가 상담을 받아보라고 권했다. 미국에서 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온 예수회 신부였다. “별다른 기대 없이 갔다. 그런데 내 삶이 통째로 바뀌었다.”


Q : 어떻게 바뀌었나.
A : “첫 상담은 한 시간이었다.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하더라. 나한테 스트레스 주었던 사람들, 아주 쌍욕을 했다. 당시 나는 밥맛도 없고, 불면증도 있었다. 그날 밤, 정말 간만에 숙면을 취했다.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니까 속도 너무너무 편안하더라. 어, 이게 뭐지 싶었다. 생각해 보니 내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어준 건 예수회 신부가 처음이었다.”

상담을 할 때마다 치유의 코드가 작동했다. “오래된 퇴적층처럼, 내면에 쌓여 있던 나의 치부가 하나씩 드러났다. 유치원 때 있었던 일, 초등학생 때 있었던 일. 나중에는 나이 차가 많고 불편한 관계였던 아버지 이야기까지 나왔다.” 홍 신부에게 상담은 일종의 고해성사였다. “나중에는 예수회 신부가 말했다. 신부라는 역할 말고, 홍성남이라는 사람에 대해 알아보라고.”

결국 홍 신부는 가톨릭대 영성심리상담 대학원에 들어갔다. 학위를 따거나 교수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을 더 깊이 알고 싶어서였다. 대학원은 그에게 일종의 ‘수도원’이었다. “어렸을 때는 효도해라, 바르게 살아라. 신학생 때는 죄짓지 마라. 이런 윤리와 교육의 억압 속에서 살았다. 대학원 갔더니 달랐다. ‘행복’과 ‘자기실현’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라. 정말 반가웠다. 내게는 거기가 천국이었다.”


Q : 왜 나의 행복이 중요한가.
A : “내가 우울한데 다른 사람한테 행복을 전할 수 있을까. 남에게 전하려면 내 마음에 행복이 먼저 있어야 한다. 뒤늦게 깨달았다. 그동안 내가 나를 미워하고 있었구나. 전에는 늘 가난하고, 낮고, 드러나지 않게 살자고 생각했다. 그게 사제의 삶이라고 여겼다. 지금은 다르다.”

홍성남 신부는 . 김종호 기자


Q : 어떻게 다른가.
A : “내가 먼저 행복해지자. 행복한 사제가 되자. 그리고 나의 행복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자. 그게 ‘사랑’이더라. 학교도, 사회도, 종교도 얼마든지 주입식 교육의 장(場)이 될 수 있다. 영성 생활이 뭔가. 내 영혼의 자유로움을 얻기 위한 삶이다. 그러니 음식이든, 교육이든, 종교든 그냥 삼키지 말고 꼭꼭 씹어 먹자. 그래야 내 눈이 생기고, 내 근육이 생기고, 나의 행복감도 생긴다.”


Q : 올해는 중앙일보 창간 60주년이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해달라.
A : “신의 눈으로, 우주의 눈으로 보면 우리에게 뭐라고 하고 싶을까. 싸우지 마라, 같이 살아라, 서로 아끼고 살아라. 이러시지 않을까. 중앙일보가 그런 길을 열어가면 좋겠다.”

◇홍성남 신부=1954년 서울 출생. 신학생 때는 해방신학에 심취했지만, 영성심리를 통해 길을 찾았다. 마석ㆍ논현2동ㆍ상계동ㆍ가좌동 성당 등 주임신부 역임. 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장.




백성호([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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