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등장한 인공지능(AI) 여배우 ‘틸리 노우드’가 영국을 넘어 미국 할리우드까지 흔들고 있다. 유명 연예기획사들이 단순한 관심을 넘어 실제 영입을 추진함에 따라 진짜 영화에서 배우로 활동할 가능성이 커지면서다. 틸리를 만든 제작사는 AI 배우가 창작자들이 예산 압박에서 벗어나 작품을 만들 자유를 줄 것이라고 홍보하지만, 기존 배우들 사이에선 “인간 노동을 도둑맞았다”는 반발이 일고 있다.
영국 텔레그래프와 미국 CNN 등에 따르면 네덜란드 출신의 배우이자 코미디언, 제작자인 판데르 벨덴은 지난달 28일 스위스 취리히에서 열린 ‘취리히 서밋’ 패널이란 토론에서 “틸리를 선보였을 때는 ‘저게 뭐지?’라는 반응이 많았다”며 “하지만 곧 어떤 에이전시가 영입할 지 발표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2월만 해도 업계는 회의적이었지만, 5월 이후 분위기가 바뀌었다”라며 “AI 프로젝트에 대한 스튜디오들의 관심이 빠르게 커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틸리는 벨덴이 이끄는 AI 제작사 파티클6 산하의 스튜디오 ‘시코이아(Xicoia)’가 선보인 AI 배우다. 올해 2월부터 인스타그램 등에서 활동해왔다. 틸리는 일자리를 얻기 위해 스크린 테스트에 참여했다거나, 배우가 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는 등 차세대 스타 지망생처럼 그려진 일상 게시물을 게재해 왔다.
시코이아가 만든 짧은 영상물에서 틸리는 연기를 선보이고 있다. 그는 지난 7월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첫 작품으로 코미디 스케치 ‘AI 커미셔너’에 출연했다고 밝혔다. 틸리는 최근 한 게시물에선 “20초 만에 괴물과 싸우고, 폭발에서 도망치고, 자동차를 팔고, 오스카상까지 거의 거머쥐었다. 말 그대로 하루 만에”라는 글과 함께 ‘AIActress’ 해시태그를 올렸다. 시코이아 측은 틸리를 스칼렛 요한슨이나 나탈리 포트먼 같은 배우로 키우겠다는 목표를 내세운다.
벨덴은 “창작자들이 예산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펼칠 수 있다는 점에서 AI는 긍정적 도구가 될 수 있다”며 “결국 관객이 원하는 것은 배우의 맥박이 아니라 이야기 그 자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틸리의 배우 기용 가능성이 커지자 헐리우드 배우들을 중심으로 격한 반발이 일어나고 있다. 미 배우 방송인 노동조합(SAG-AFTRA)은 성명을 내고 “명확히 말하자면 틸리 노우드는 배우가 아니다. 수많은 전문 연기자들의 연기를 바탕으로 훈련된 컴퓨터 프로그램이 허락이나 보상 없이 만들어낸 캐릭터”라며 “이 캐릭터는 삶의 경험이나 감정을 끌어낼 수 없으며, 우리가 목격한 바에 따르면 관객들은 인간의 경험과 무관한 컴퓨터 생성 콘텐트를 보는 데 관심이 없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는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 오히려 도용된 연기를 이용해 배우들을 실직시키고, 배우들의 생계를 위협하며, 인간의 예술성을 훼손하는 문제를 야기한다”고 덧붙였다.
이런 비판에 벨덴은 “틸리는 인간을 대체하는 게 아니라 창작의 한 형태다. 애니메이션·인형극처럼 AI도 이야기를 만드는 새로운 도구일 뿐”이라며 “AI 캐릭터는 인간 배우와 비교하기보다는 (애니메이션 등처럼) 독립된 장르로 평가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배우와 작가·감독들은 “AI 배우는 인간의 창작물을 무단 학습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반발한다. 시스터 액트 등에 출연한 배우 우피 골드버그는 “다른 배우 5000명의 요소를 합성해 만든 것(노우드)과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화 ‘마틸다’에 출연한 마리 윌슨도 “당신은 아무것도 직접 만들지 않았다. 수백명의 실제 노동자, 사진가, 촬영기사의 자료를 훔쳤을 뿐”이라고 비난했다. ‘왕좌의 게임’ 출연 배우 소피 터너, ‘엄브렐라’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에 출연한 카메론 카우퍼스웨이트 등도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비판을 쏟아냈다.
실제 지난 2023년 헐리우드 배우 노조가 대규모 파업을 벌였을 때도 핵심 쟁점은 AI의 무단 활용과 권리 침해였다. 당시 노조는 합의를 통해 메이저 스튜디오의 AI 활용 범위를 제한했지만, 제3자의 독립적 AI 활용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AI 모델들은 인터넷에서 방대한 자료를 수집해 학습했고, 이는 배우 외모, 연기 스타일, 영화 장면의 무단 재현으로 이어지고 있다.
텔레그래프는 “파티클6 측은 틸리를 기용할 경우 인간 배우 출연 비용의 최대 90%까지 절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며 “벨덴의 야망이 실현되든 그렇지 않든, 틸리의 등장은 AI 배우가 그보다 훨씬 비싼 실제 스타를 대체할 수 있을지에 대한 영화 산업의 고민을 보여주는 신호”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