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은 긴 시간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가 대학 졸업을 목전(대학 3학년)에 둘 정도다. 손흥민은 15년간 A매치 137경기를 뛰어 역대 최다 출전 기록을 세웠다. 카카오와 쿠팡, 배달의민족은 각각 2010년 설립돼 자기 영역에서 최고의 기업이 됐다. 사람이든, 기업이든 완전히 새로운 역사를 쓸 수도 있는 시간이다.
15년. 누군가에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이 됐다. 23명의 목숨을 앗아간 화재가 발생한 리튬 1차전지 업체 아리셀의 박순관 대표와 아들 박중언 총괄본부장 얘기다. 지난달 23일 수원지법 형사14부가 이들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시행 4년째를 맞은 중대재해처벌법 사례 중 가장 높은 형량이다.
23명 사망 아리셀 업주, 징역 15년
안전투자 외면, 사고 땐 합의 시도
장부엔 없지만 결국 막대한 비용
가혹하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정한 살인죄 기본 형량의 상한이 징역 16년이다. 참작할 동기가 있는 상황이었다면 6년이다. 고의가 전제된 살인도 그 정도인데, 산재 관리에 실패한 과실범에게 징역 15년이 나왔으니 놀랄 만하다. 반면에 유족들은 희생자 한 사람당 1년도 채 안 된다며 반발한다.
중대재해처벌법은 만들 때부터 논란이 컸다. 현장 책임자도 아닌 기업주를 엄벌하는 데 초점을 맞추면 피해자 입장에선 후련할지 모르지만, 정작 산업재해를 막진 못할 것이란 주장이 많았다. 국회 입법조사처가 8월 말 발표한 입법영향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산재 사고 사망자는 827명으로 법 시행 직전 연도인 2021년(828명)과 차이가 없었다. 질병 사망을 포함한 전체 재해 사망자도 2021년 2080명, 지난해는 2098명이다. 올 상반기에도 산재 사망자는 1120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87명이나 늘었다. 숫자만 보면 우려가 현실화하는 듯하다.
그런데 정작 아리셀 사건에서 예상을 뛰어넘는 판결이 나온 뒤 우려나 비판의 목소리는 별로 들리지 않는다. 재해 규모와 참혹함 앞에서 입을 열기가 쉽지 않은 측면도 있지만, 재해에 이르는 과정에 동정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리튬은 열 폭주로 인한 폭발 위험이 있고, 일단 불이 붙으면 잘 꺼지지 않는 위험한 물질이다. 아리셀에선 사고 당일 전조 증상인 작은 폭발이 있었지만 작업을 강행했다. 충격과 하중에 약한 배터리 재고를 출입구 앞에 잔뜩 쌓아뒀다. 반대 방향에 있는 비상구로 가는 길엔 가벽을 세웠고, 비상구는 보안장치로 사실상 막았다. 작업자 대부분은 제조업에는 법으로 금지된 파견 근로자였다. 위험성도, 비상시 대응 요령도 교육받지 못한 비숙련 파견 근로자들은 불이 나자 대부분 출입구와 비상구의 반대쪽 구석에 뒤엉킨 채 희생됐다.
재판부는 판결문에 당시 작업 상황이 담긴 CCTV를 본 소회를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전지를 등 뒤에 두고 막다른 곳에서 작업하는 근로자들이 너무나도 위험하게 느껴진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런 불안감은 피고인들이 화재 발생 전에 느꼈어야 하는 것이고, 이를 느끼지 못하고 근로자들을 방치하는 것이 바로 안전불감증”이라고 질타했다.
사실 특정 현장에서 사고가 날 확률은 높지 않다. 반면에 안전에 대한 투자는 바로 장부에 비용으로 잡힌다. 그래서 안전에 대한 투자를 외면하다, 혹시 사고가 나면 그동안 벌어들인 이윤의 일부로 합의를 시도한다. 합의가 성사돼 처벌불원서를 받아오면 법원도 형을 감해 주는 게 관행이었다. 아리셀 사건 재판부는 “이런 악순환을 뿌리 뽑지 않는 한 우리나라 산재 발생률은 줄지 않을 것”이라고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1심 형량이 상급심에서 그대로 유지될지는 미지수다. 또 중한 형이 쏟아진다고 해서 당장 산업재해가 줄지도 않을 것이다. 재해 예방에 꼭 엄벌주의만 정답은 아니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안전불감증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비용이 될 수 있다는 점이 이번 판결로 분명해졌다. 생명에 대한 존중을 아무리 강조해도 먹히지 않는 산업 현장에 이 방식이 어쩌면 더 효율적인 방법일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