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자신이 취임 이후 무려 8개의 전쟁을 끝냈다고 주장한다. 8개가 정확한지는 시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최근 가자지구 평화협상은 트럼프의 공이 큰 것이 사실이다. 일단 가자 휴전 합의 1단계는 지켜질 것 같다. 다음 단계는 영구적 평화 구축, 하마스 무장 해제와 가자지구 통치 중단, ‘기술 관료’ 중심의 새 정부 수립,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의 가능성 모색이 돼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하마스가 스스로 무장 해제에 나설 가능성이 없고, 팔레스타인 ‘기술 관료’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게다가 대다수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정착민은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를 거부하고 있고, 네타냐후 이스라엘 정부의 연정 파트너들은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을 반대하는 상황에서 다음 단계로의 진전에는 큰 진통이 따를 것이다.
노벨상 집착 트럼프의 다음 타깃
중·러 밀착한 북, 압박감 못 느껴
APEC 회의 즈음 윤곽 드러날 듯
트럼프는 노벨평화상에 집착하고 있다. 그는 과거 북한과의 외교 성과를 빌미로 자신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추천해 달라고 문재인 전 대통령과 아베 신조 전 총리를 압박했다. 가자지구 평화 협상안이 발표된 며칠 뒤 노벨위원회가 수상자로 베네수엘라 야권 지도자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를 선정하자 백악관은 격분했다. 트럼프가 얼마나 자신의 공로를 인정받고 싶어하는지를 보여줬다. 따라서 트럼프는 또 다른 전쟁 종식 후보지를 물색할 가능성이 높다. 이번 달 아·태경제협력체(APEC) 참석차 한국 방문을 계획하고 있는 트럼프의 북·미 정상회담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과연 가자지구 평화 협상 타결이 북한으로도 이어질까.
가자지구의 경우 트럼프의 역할은 결정적이긴 했지만, 교전 중단의 초석은 이미 그 전에 마련돼 있었다. 먼저 하마스는 궁지에 몰린 상태였다. 이스라엘군은 하마스를 초토화했고 하마스 지도부는 출구를 모색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레바논 헤즈볼라 공습과 미국의 이란 공습으로 하마스에 대한 국제적 지원도 위축됐다.
이스라엘에서도 인질 석방 협상이 지지부진하자 네타냐후 총리에 대한 이스라엘 국민의 불만이 커지고 있었다. 공화당의 의회 장악으로 트럼프는 전임 조 바이든 대통령과는 달리 이스라엘을 압박할 국내 정치적 여지를 확보하고 있다. 영리한 외교와 트럼프 일가와의 비즈니스 관계가 더해져 트럼프는 걸프 아랍국가의 지지도 확보했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은 북한엔 해당하지 않는다. 하마스와는 달리 김정은 정권은 큰 압박에 놓여 있지 않다. 북한은 중국과 러시아로부터 전에 없는 지원을 받고 있다. 중·러는 유엔 안보리의 압박으로부터 북한을 방어하고 있으며, 러시아는 파병 대가로 북한에 대한 경제적·기술적 지원을 하고 있다. 김정은이 외교적으로 타협할 필요가 없음을 보여주는 정황은 차고 넘친다.
지난번 북·미 정상회담과 비교할 때 시급성도 덜하다. 이번엔 한반도 전쟁 위협도 없으며, 이에 따라 북·미 정상회담이 정치적으로 가져올 드라마틱한 효과도 덜하다. 설령 정상회담이 성사된다 하더라도 이미 한번 본 드라마의 재탕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회담 의제도 의문이다. 2019년 하노이 협상 결렬은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에 확신이 없었던 트럼프가 회담장을 박차고 나갔기 때문이었다. 2018~19년 북한의 제안이 충분하지 않았다면 2025년의 제안이라고 특별히 매력적일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트럼프는 공식적인 종전 선언을 위한 협상을 북한과 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종전 리스트에 북한을 올릴 수 있겠지만, 실질적인 비핵화 없이는 가자지구 평화협상과 같은 국제적 환호를 받을 리 없다. 공화당 주도의 의회조차 유엔사 폐지나 주한미군 철수를 저지하기 위해 조용히 움직일 것이다.
트럼프 자신이 협상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미·중 무역 협상은 중국의 핵심 광물 수출 통제 발표로 차질을 빚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문제에 있어 트럼프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다. 트럼프는 또 자신이 설립한 가자지구 평화위원회 의장으로서 당분간 분주할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이 북·미 외교 가능성의 변수다. 이달 말 경주 APEC 회담이 열릴 즈음 윤곽이 드러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