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당국에 구금돼 있던 한국인 64명이 지난 18일 전세기를 타고 인천국제공항으로 송환됐다. 정부 합동 대응팀 단장을 맡은 김진아 외교부 2차관은 입국 직후 기자들과 만나 캄보디아 정부의 협조와 대응팀의 노고에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여전히 캄보디아 곳곳에는 1000여 명의 한국인이 범죄조직에 감금되거나 착취당하고 있다.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며 극심한 두려움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고 피해자 가족들은 절망과 분노 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캄보디아 구금 64명 겨우 송환
외교·안보·수사 체계 모두 부실
국경 넘는 초국가적 범죄의 확산
해외 국민 보호에 국정원이 최적
몇 년 전부터 수백 건의 신고가 접수됐고 언론도 여러 차례 실태를 보도했지만, 정부는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정부 인사는 이번 사태를 “최근에서야 파악했다”고 해명했다. 정부는 문제를 외면해왔고 책임 있는 대응은 없었다. 안보와 수사·외교 전반에 걸친 대응 시스템의 총체적 부실이다. 국가정보원은 무엇을 했으며 경찰과 외교부·검찰은 어떤 역할을 했단 말인가. 국가 기능의 실종이다. 국민이 분노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수리남 마약왕 일망타진 등의 사례 캄보디아에서 한국인이 연루된 범죄는 보이스피싱과 로맨스스캠을 통한 금전 사기, 대포통장을 이용한 자금 세탁, 강제 노동과 감금 등으로 나타난다. 일부 범죄조직에서는 장기 매매 같은 극악한 범죄까지 함께 저지른다고 한다. 피해자와 가해자, 범죄 자금과 물품이 한국과 캄보디아를 넘나들며 발생했다. 국경을 건너 피해자와 가해자, 자금과 범죄조직이 오가는 사건은 한 국가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2007년 샘물교회 선교단 아프가니스탄 피랍사건에서 국정원은 22명의 인질을 성공적으로 구출했다. 국정원의 현지 정보망과 ‘선글라스맨’으로 알려진 전문 협상 요원의 능숙한 파슈툰어 실력이 협상의 핵심 역할을 했다. 김만복 당시 국정원장이 직접 협상에 참여했고 필요한 순간 신속한 의사 결정을 내린 것도 성공 비결이었다.
2011년 소말리아 해적이 아라비아해에서 한국 선박 삼호주얼리호를 납치했다. 정부는 해군 특수전여단이 참여한 아덴만 여명 작전을 통해 신속하게 대응했다. 해적 8명은 사살되고 5명은 생포되었으며 선원 21명은 모두 무사히 구출됐다. 국정원의 실시간 감청과 정보 지원이 구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해적의 위치와 움직임을 정확히 파악함으로써 작전 계획을 최적화해 신속하고 안전한 구조를 가능하게 했다.
2000년대 초반 수리남에 거주하는 한국인 마약왕에 관한 첩보가 국정원 국제범죄정보센터에 들어왔다. 국제범죄정보센터는 해외 공작부서에 첩보 확인을 의뢰했고 수리남에 상주 조직이 없던 공작부서는 인근 국가에서 활동 중인 요원을 현지로 급파했다. 국제범죄정보센터와 해외 공작부서 협업에 더해 국정원과 외국 정보기관과의 유기적 정보협력으로 마약왕 일당을 일망타진했다. 2022년 방영된 영화 ‘수리남’의 배경이 된 사건이다.
필자의 국정원 입사 동기인 A씨는 2001년 북한산 히로뽕 밀반입 조직을 최초로 검거한 인물이다. A씨가 적발한 히로뽕 30㎏은 100만 명이 투약할 수 있는 양으로, 당시 기준으론 사상 최대 규모였다. 그는 이후 남미 마약왕 사건의 수사를 총괄하기도 했다. 30여 년간 국제범죄 현장에서 발군의 성과를 거둔 A씨는 이렇게 말한다.
“국제범죄정보는 첩보 수집단계서부터 해외정보조직을 갖추고 있는 국정원이 가장 많이 알 수밖에 없는 구조다. 수집된 첩보의 검증단계에서도 해외 정보망을 운영하고 국제적 정보협력 네트워크를 유지하는 국정원이 다른 기관에 비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그에 비해 경찰은 내부 의사 결정 과정이 복잡해 신속한 대응이 어려웠다. 해외 출장도 쉽지 않았다. 해외에서 일어나는 범죄정보를 수집해도 첩보의 검증이 쉽지 않은 것은 당연한 결과다. 제보자가 국정원을 선호하고, 경찰도 국정원과 공조를 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경찰은 범죄 발생 이후 수사를 중심으로 움직이지만, 정보기관은 범죄 발생 전 징후 포착과 예방에 중점을 둔다. 정보기관은 본질적으로 비공개 작전, 잠입 활동, 비밀 협상 등을 수행할 수 있는 구조를 갖췄다. 공개수사를 중심으로 하는 경찰에서 수행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인원을 늘려도 신분이 공개된 경찰 주재관은 해외에서 범죄조직의 핵심부에 잠입하거나 범죄 자금의 흐름을 은밀히 추적하는 데 한계가 있다. 직원 수의 문제가 아니고 본질의 문제다.
해외 공작망까지 갖춘 국정원의 강점 통신의 발달로 사람과 자금·정보가 국경을 쉽게 넘나들면서 초국가적 범죄가 빠르게 퍼지지만, 이에 대응해야 할 국가적 시스템은 여전히 부실하다. 내년이면 사라질 검찰에 적극적인 대응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미 과부하 상태인 경찰에게 국제범죄 수사에 집중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국정원이 정보를 수집해도 검찰과 경찰이 이를 제대로 수사하지 못한다면 국정원의 정보수집 역량 또한 약화할 수밖에 없다. 국민의 안전을 지켜야 할 국가의 기본 기능이 사실상 실종된 상태다. 국민의 안전을 지키지 못하는 국가는 더는 국가라 할 수 없다.
국정원에 국제범죄 수사권을 부여하면 어떨까. 국정원 대공 수사권이 폐지됐으니 고도로 훈련된 대공 수사 인력 중 일부를 국제범죄 수사에 투입할 수 있다. 마약, 인신매매, 자금 세탁, 사이버 범죄, 산업 스파이에는 이념이나 정치가 개입할 여지가 적다. 오직 국민의 안전만 있을 뿐이니 국정원에 국제범죄 수사권을 주지 못할 이유가 없다.
국정원에 국제범죄 수사권 준다면 2000년대 초반 정권이 바뀔 때마다 흔들리는 정체성의 혼란을 막기 위해 직원들이 의견을 수렴해 국정원의 변치 않는 핵심 가치를 만들었다. 삼국(三國) 삼보(三保), 즉 ‘국가를 보위한다. 국체를 보존한다. 국민을 보호한다’이다. 이런 직원들이 모인 기관이 국정원이다. 국정원엔 무수한 ‘람보’들이 출격을 준비하고 있다. 세계 5위의 군사력, 세계 13위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이다. 국민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국정원 최정예 요원들을 활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샘물교회 인질 협상 당시 김만복 전 원장과 ‘선글라스맨’의 활동을 현장에서 지원한 숨은 ‘람보’가 있었다. 필자가 국가정보대학원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가르쳤던 B씨였다. 명문대 출신이던 그는 영어에 능통했고 백발백중 사격의 명수였다. 동료들은 그를 ‘제임스 본드’라 불렀다. 그랬던 그가 마흔을 갓 넘긴 나이에 국정원을 떠났다. 그의 마지막 보직은 회의 자료를 만들고 문서의 오·탈자를 찾는 일이었다. 간부들은 유능한 요원을 가까이 두고 싶어하지만, 현장에 최적화된 요원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호랑이가 개처럼 살면 포효하는 법을 잊고 독수리가 닭장에 오래 있으면 날갯짓을 잊는다. 호랑이는 호랑이로, 독수리는 독수리로 길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