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 종식 논의가 다시 교착 상태에 빠진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2일(현지시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회동 취소 사실을 공개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날 러시아의 최대 석유기업 두 곳을 제재 대상에 올렸다. 트럼프 2기 행정부 들어 러시아를 상대로 한 직접 제재는 이번이 처음이다. 종전 타결을 촉구하기 위해 다시 ‘압박 모드’로 전환한 것으로 풀이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에서 마르크 뤼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ㆍ나토) 사무총장과 회담하는 자리에서 “우리는 푸틴 대통령과의 회담을 취소했다. 적절치 않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가 도달해야 할 지점에 이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취소했다”고 배경을 밝힌 뒤 “하지만 우리는 미래에 다시 회동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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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부다페스트 미·러 회담’ 무산
트럼프 대통령은 당초 지난 16일 푸틴 대통령과 통화한 뒤 2주 안에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미ㆍ러 정상회담을 가질 것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이 정상회담 사전 조율을 위해 통화하는 과정에서 우크라이나 종전과 관련해 상당한 이견이 확인돼 결국 정상회담 무산에 이른 것으로 관측된다.
러시아는 평화 협상의 전제 조건으로 우크라이나가 동부 핵심 거점 돈바스(도네츠크ㆍ루한스크) 지역을 모두 넘겨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은 현재 전선을 그대로 동결한 상태에서 휴전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러 최대 석유기업 2곳과 자회사 제재
미 재무부 해외자산통제국(OFAC)은 이날 “러시아가 평화협상에 진지하게 임하고 있지 않음에 따라 러시아에 추가 제재를 부과한다”며 “이번 제재를 통해 러시아 에너지 부문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고, 크렘린(러시아 정부)이 전쟁 자금을 조달하고 경제를 지탱하는 능력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제재 대상은 러시아 최대 석유기업 로스네프트와 루코일 두 곳과 그 자회사 30여 곳이다. 해당 두 기업은 러시아 전체 석유 수출량의 대략 절반을 차지하는 최대 생산기업이다.
재무부 제재 대상에 오름에 따라 이들 기업이 직ㆍ간접적으로 50% 이상 지분을 가진 모든 법인은 자산 동결 조치가 이뤄진다. 스콧 베센트 미 재무장관은 ‘동맹국 동참’을 호소했다. 베센트 장관은 “이제는 살상을 멈추고 즉각적인 휴전에 나서야 할 때”라며 “우리 동맹국들이 이번 제재에 동참하고 따라주기를 촉구한다”고 했다. 또 “필요하다면 추가 조치를 취할 준비가 돼 있다”며 추가 제재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 8월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이유로 인도에 관세 50%를 부과하는 2차 제재에 들어갔지만, 러시아를 직접 겨냥한 1차 제재를 단행한 것은 2기 행정부 들어 처음이다. 블룸버그 통신은 “푸틴 대통령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짚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對)러 제재 배경에 대해 “제재할 때가 됐다고 느꼈다. 오랫동안 기다렸다”고 말했다. 다만 “(이번 제재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기를 바란다. 휴전이 이뤄지기를 희망한다”고도 했다.
유럽연합(EU) 역시 2026년 말까지 러시아산 액화천연가스(LNG) 수입을 전면 중단한다. EU 27개국은 23일 러시아산 LNG 수입 금지를 포함한 19차 대러시아 제재 패키지를 채택했다. 확정된 제재안에 따르면 1년 이내 러시아산 LNG 단기 계약은 6개월 이내 모두 종료하고 장기 계약은 2026년 12월 31일까지 파기해야 한다.
EU는 차용범 북한 국방성 제1부상 겸 종합국장(중장)도 제재 명단에 올렸다. “러시아에 파병된 북한군 고위 지휘관 중 한 명으로 식별된다”는 이유에서다.
러시아 측은 미국 측의 정상회담 취소에 대해 “러시아에 대한 전쟁 행위”라고 비난했다. 푸틴 대통령의 측근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은 23일 텔레그램에 올린 글에서 “미국은 우리의 적”이라며 “현재 트럼프는 완전히 미친 유럽과 동맹을 맺었다. 물론 미국은 그(트럼프)가 어쩔 수 없었고 의회 등의 압박을 받았다고 말하겠지만 요점은 바뀌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미국의 추가 제재 조치에 대해서도 “특별히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리야 자하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은 23일 브리핑에서 “이 조치가 중요한 협상을 통한 우크라이나 분쟁 해결에 대한 신호를 보내는 측면을 포함해 완전히 비생산적이라고 생각한다”면서도 “우리나라는 서방 제재에 강력한 면역력을 발전시켜왔고 앞으로도 에너지 분야를 포함한 경제적, 정치적 잠재력을 자신 있게 발전시킬 것”이라고 강조했다.
EU의 제재에 대해서는 “효과 없고 오히려 EU에 해를 끼친다”면서“그들이 우리를 해치려는 시도가 명백히 성공적이지 않더라도 우리의 근본 이익을 고려해 적절하고 의도적이며 응당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했다.
한편 트럼프 대통령은 이달 말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개최가 예상되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미ㆍ중 정상회담에 대해서는 “상당히 긴 회담이 예정돼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에서 중국의 희토류 수출 통제 문제와 미국산 대두 수입 재개, 핵 군축 문제 등을 폭넓게 논의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아마 핵 문제에 대해서도 합의에 이를 것으로 생각한다”며 “우리가 핵무기가 가장 많고 두 번째가 러시아, 중국이 차이가 꽤 큰 세 번째인데 4~5년 안에 너무 많아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