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후 정상회담을 앞둔 한·미 정상이 교착 상태인 무역 협상의 책임론을 놓고 대립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미국의 과도한 요구가 원인”이라고 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타결은 한국의 선택에 달렸다”고 압박했다. 협상 지연의 책임을 서로에게 돌리며, 회담 전부터 치열한 여론전을 벌이는 모습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27일 공개된 블룸버그통신과 인터뷰에서“투자 방식, 투자 금액, 시간표, 우리가 어떻게 손실을 공유하고 배당을 나눌지, 이 모든 게 여전히 쟁점”이라고 밝혔다. 이달 초부터 이어진 장관급 협상에서 “이견을 좁혀가고 있다”며 낙관적 기대를 전달했던 것과는 온도 차가 크다.
현재 양국은 지난 7월 큰 틀에서 합의한 3500억달러(약 500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 패키지 구성과 이행 방식을 놓고 줄다리기를 벌이고 있다. 미국은 향후 8년간 매년 250억 달러씩 2000억 달러를 직접 현금 투자로 집행하라 요구하고 있으며, 한국은 연 150억 달러 이상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통령은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것이 한국에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번 인터뷰는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과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과 협상을 진행한 다음날인 24일 이뤄졌다. 최근 잇따라 외신인터뷰에 나선 이 대통령은 “미국의 요구가 과도해 한국이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결국 협상은 잘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반복해서 내고 있다. 익명을 요청한 한 통상전문가는 “협상이 결렬될 경우 책임이 미국의 과도한 요구에 있다는 인식을 확산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고 전했다.
이와 달리 트럼프 대통령은 24일(현지시간) 아시아 순방길에 오르며 “한·미 협상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있다”며 “그들이 준비됐다면, 나도 준비됐다”고 말했다. 미국의 요구를 한국이 받아들여야 합의가 가능하다는 의미다. 정인교 전 통상교섭본부장(인하대 교수)은 “트럼프 대통령은 협상 책임의 공을 한국에 넘기며 압박 구도를 만들고 있다”고 설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막판 압박’을 반복하는 그의 협상 패턴을 다시 꺼내들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말레이시아·일본 등 아시아 순방길에 나선 트럼프 대통령이 이 기간 한국을 향한 추가적인 압박이 나올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양국 정상이 직접 나서 여론전을 펼치는 것 자체가 물밑 협상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신호로 해석하는 낙관론도 있다. 이재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7월부터 세 달 가까이 이어진 협상이 이번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기간에도 결론을 내지 못하면 ‘한국 개최 불발’이라는 인식이 국제적으로 부각될 수밖에 없다”며 “양국이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투자한 만큼 이번 회담을 그냥 넘기긴 어렵다”고 말했다.
허윤 서강대 교수는 “협상이 장기화되면 시장 불확실성과 투자 위축 등 양측 모두에 손해”라며 “서로의 피해를 인식하고 양보를 유도하면 협상 속도가 붙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다만 그는 “관세·투자 등 경제 이슈 안에서만 균형을 찾으려 하다 보니 주고받을 카드가 부족하다”며 “일본처럼 안보·기술·투자·산업을 포괄하는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이런 가운데 미·중이 사실상 휴전 모드 돌입하고, 미국이 동남아 국가들과 무역 협상을 타결한 것도 한·미 협상 지형에 영향을 미칠 변수로 꼽힌다. 미국과 중국은 25~26일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고위급 회담에서 대두 수입, 희토류 수출 통제, 100% 추가 관세 철회 등에 합의했다. 26일에는 말레이시아·캄보디아·태국·베트남과의 무역 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과의 합의를 성과로 내세우며 “중국도 양보했다”는 논리로 한국에 더 큰 양보를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 반면 미국이 이미 중국과 협상에서 일정부분 성과를 확보한 만큼, 한·미 협상은 ‘형식적 타결’ 수준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박성훈 고려대 국제대학원 명예교수는 “한·미 양국이 이미 입장을 충분히 확인한 만큼 절충의 여지는 남아 있다”며 “이번 정상회담은 한·미 동맹의 경제적 균형을 새로 시험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