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천원짜리가 3천원에, 3천원짜리는 1만원까지 프리미엄이 붙어 암표 거래가 성행, 그라운드 밖에서도 OB-삼성전의 열기를 뿜었다.”(1982년 5월 24일자 중앙일보 기사 「암표값 1만원까지 빈병 난무 선수대피 OB-삼성전」中)
한국프로야구(KBO) 출범 원년 1982년에도 암표는 성행했다. 다만 43년이 지난 지금 암표상들은 자동 예매 프로그램인 매크로를 활용하면서 고도로 진화했다는 게 차이다. 경기장·공연장 인근에서 경찰과 눈치 싸움을 벌이던 암표상들이 PC방으로 아예 터전을 옮기면서다.
대전경찰청 사이버수사대는 2023년 3월부터 지난 7월까지 서울과 경기도 피시방에서 매크로 프로그램으로 5254회에 걸쳐 프로야구 티켓 10만881장을 예매해 암표로 판매한 혐의를 받는 A씨(42) 등 3명을 정보통신망법 위반 등 혐의로 검거했다고 21일 밝혔다. A씨가 암표를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팔아 얻은 순수익은 약 3억1200만원으로 조사됐다. 하루에 티켓 128장을 팔아 1527만원을 번 날도 있었다.
A씨는 가족 ID등 여러 계정을 매크로 예매에 활용해서 대기 없이 좌석 선택 창으로 바로 연결되는 ‘직접링크’ 주소를 이용했다고 한다. 또 선(先)예매가 가능한 구단 유료 멤버십에 가입한 뒤 매크로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불법적으로 좌석을 선점했다. 그러다가 지난 7월 A씨는 경기 여주 소재 한 PC방에서 컴퓨터 3대를 동시에 켠 채 암표 작업에 열중하다가 경찰에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A씨는 “생활비 등을 벌려고 범행했고, 매크로 프로그램은 인터넷에서 받았다”고 진술했다.
문제는 매크로를 활용한 암표 거래 단속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요즘은 인터넷에서 매크로 프로그램을 쉽게 구할 수 있어서다. 지난해 한국시리즈와 유명 트로트 가수 콘서트의 표를 되판 암표상 4명을 검거한 황재철 광주경찰청 사이버수사대 팀장은 “요즘 암표상들은 운이 좋아야 겨우 잡을 수 있다”라며 “암표상을 특정해도 그가 매크로를 활용했는지 등 증거 확보가 쉽지 않기도 하다”고 말했다.
매크로 활용 암표 거래 수사는 먼저 온라인에서 티켓을 과도하게 판매하는 수상한 아이디를 모니터링한 뒤 IP 추적을 진행한다. 여러 아이디의 동시접속 정황 등을 포착해 매크로를 활용했는지 등을 순차적으로 확인해나가는 식이다. 이를 위해 통신자료 수사나 압수수색 등의 절차가 필요하지만, 매크로 활용 의심 정황만으론 법원의 영장 발부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게 일선 수사기관의 설명이다. 황 팀장은 “한 티켓 재판매 플랫폼의 경우 계정 정보가 가려져 있어 특정이 안 돼 영장 신청을 할 수조차 없다”고 전했다.
매크로를 제작·이용해 암표를 파는 행위 외에 암표 구매 행위 자체에 대해 제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공연법 및 국민체육진흥법 등 현행법상 표 관련 매크로를 제작·배포하는 행위는 처벌 대상이지만, 암표를 구매한 행위에 대한 제재 조항은 담기지 않았다.
국민권익위원회는 지난해 9월 문화체육관광부에 암표 거래를 전면 금지하고, 처벌 수위 강화 및 범죄 수익 몰수·추징을 권고했다. 이훈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5월 온라인으로 암표를 사고파는 행위에 대해 30만원 이하 벌금을 물리는 경범죄처벌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하기도 했다.
강훈식 대통령 비서실장은 이날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매크로 사용 등 명백한 불법에만 국한된 단속을 넘어 암표 거래 자체를 근절할 수 있는 근본적인 제도개선이 필요하다”며 관계 부처에 제도 정비를 지시했다.
다만 지나친 규제가 오히려 더 깊은 암시장을 형성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허구연 KBO 총재는 지난 7월 기자간담회에서 암표 근절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미국의 경우 리셀(재판매)이 비교적 자유롭다. 계속 방안을 연구하고 있지만 인식의 전환도 필요하다”고 했다.
황석진 동국대 국제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암표 시장은 수요와 공급이 맞지 않아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만큼 근절은 사실상 어렵다”며 “매크로가 암표 문제의 핵심으로 부각되는 만큼 과다 거래 이용자에 대한 플랫폼 등의 제재 의무 부과 등 구체적인 제도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