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7년에 제작된 바이올린 ‘스트라디바리우스 베수비오’가 한국에서 최초로 공개된다.국가유산청과 이탈리아대사관은 다음달 1일부터 서울 정동 덕수궁에서 ‘덕수궁에서 울리는 스트라디바리우스’ 전시를 연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한국-이탈리아 상호문화교류의 해 행사의 일환이다.
베수비오는 이탈리아 크레모나에서 태어나고 활동한 역사적인 현악기 제작자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1644~1737)가 1727년에 제작한 바이올린이다. ‘보물급’ 악기 베수비오의 현재 시장 가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다른 스트라디바리우스의 경우 보관 상태, 음질, 이력 등에 따라 수백만 달러 이상인 경우가 적지 않다. 베수비오와 비슷한 시기 제작된 스트라디바리우스 레이디 블런트(1721년 제작)는 2011년 1590만달러(약 228억원)에 거래되기도 했다.
베수비오를 소유하고 있는 크레모나시 바이올린 박물관(Museo del Violino) 재단 이사장이자 크레모나 시장인 안드레아 비르질리오(52)는 이번 전시를 위해 한국을 찾았다. 그는 30일 중앙일보와 만나 “베수비오는 여러 차례 우리 도시와 문화, 크레모나 현악기 제작의 탁월함을 알리는 문화 대사 역할을 해왔다”고 말했다.
“베수비오는 스트라디바리의 예술적 완숙기에 해당하는 시기에 제작된 작품입니다. 당시 그는 아들들과 함께 가족 공방을 이끌고 있었는데, 80세가 넘는 고령임에도 제작의 모든 단계에 개입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해요. 베수비오는 그때의 제작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견고하면서도 자연스럽게 흐르는 우아한 형태, 최상급 목재 사용, 무엇보다 깊고 힘 있는 저음이 돋보이는 독보적인 음색을 지니고 있죠.”
진한 붉은색의 바니시(바이올린 칠)가 이탈리아 화산 베수비오과 비슷해 베수비오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 악기는 긴 역사만큼 많은 연주자, 애호가들의 손을 거쳤다. 문서상 베수비오에 대한 최초 기록은 1890년 호주에서 발견된다. 당시 뉴사우스웨일스주 총리를 세 차례 지낸 제임스 마틴 경의 소유였고 이후 그의 딸인 플로렌스 마틴이 유럽 땅을 밟으며 베수비오도 바다를 건넜다. 1938년엔 바이올리니스트 안토니오 브로사의 손으로 넘어왔고, 그가 1940년 뉴욕 카네기홀에서 벤저민 브리튼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세계 초연할 땐 대서양을 넘나들기도 했다.
베수비오가 고향에 돌아온 건 2005년이다. 마지막 주인인 영국-이탈리아계 바이올리니스트 레모 라우리첼라가 2003년 사망 시 베수비오를 크레모나시에 기증하면서다. 귀향길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8만2000파운드(약 1억5000만원) 이상의 상속세가 발목을 붙잡았다. 영국 상속법에 따르면 외국 기관으로 자산을 기증할 경우 영국 내에서 상속세를 먼저 납부해야 했다. 비르질리오 시장은 “당시 크레모나 시민 전체가 힘을 모아 모금 활동을 펼쳐서 상속세와 수속 비용을 충당했다”고 말했다.
“베수비오가 상속세 문제로 크레모나에 오지 못한다는 걸 들은 크레모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금 운동을 벌였습니다. 당시엔 요즘 흔한 크라우드펀딩, 공지를 하는 온라인 사이트 같은 것도 없었으니 정말 기적적인 일이었죠. 크레모나는 인구 7만명의 아주 작은 도시지만 이들 대부분이 현악기 공방에서 일하는 전문가, 연주자들입니다. 바이올린이 얼마나 크레모나의 공동체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지 보여주는 에피소드라 할 수 있습니다.”
베수비오의 마지막 주인은 왜 크레모나를 선택했을까. 비르질리오 시장은 “크레모나는 악기를 만들고 보존하는 데 최적화 된 곳”이라고 강조했다. “크레모나는 아마티, 스트라디바리, 과르네리 등 뛰어난 바이올린 명장들이 활동한 16세기 이후 현재까지 180여개의 공방이 자리 잡으며 ‘현악기 제작의 성지’로 불리고 있어요. 뿐만 아니라 베수비오가 평소 전시되는 바이올린 박물관엔 바이올린 연구를 위한 연구소만 두 개 있습니다. 도시 전체가 현악기를 위한 생태계라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2012년엔 이런 노력을 인정 받아 크레모나의 전통 현악기 제작기술이 유네스코 인류문화무형유산으로 지정됐다. 비르질리오 시장은 “이는 단순한 명예가 아니라 세대를 거쳐 이어진 지식, 기술을 계속 이어나가겠다는 공동체적 책임, 약속”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베수비오뿐 아니라 베수비오의 역사, 스트라디바리의 삶, 크레모나의 현악기 제작 전통을 소개하는 영상도 함께 공개된다. 이와 함께 국가무형유산 악기장이 제작한 가야금,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인 이화문이 장식된 거문고 등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비르질리오 시장은 “베수비오를 비롯한 악기들은 역사가 더해진 값진 시간의 선물”이라며 “악기가 걸어온 길 위에 남겨진 위대한 흔적들 읽어달라”고 말했다. 전시는 다음달 21일까지 덕수궁 돈덕전에서 열린다. 관람료는 무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