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한국 정부와 기업에 공급하기로 약속한 그래픽처리장치(GPU) 물량 26만장 중 5만장은 현대차그룹의 몫이다. 삼성·SK·네이버 같은 반도체·정보통신(IT) 기업도 아닌 현대차가 왜 GPU가 필요할까. 자동차 산업의 패러다임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기름 잘 넣으면 잘 달리는 운송 수단에 불과하던 자동차는 이제 '움직이는 고성능 컴퓨터'로 변모했다. 전 세계 완성체 업계가 GPU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는 배경이다.
4일 업계에 따르면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은 엔비디아와의 협력을 빠르게 확대하고 있다. 테슬라가 대표적이다. 엔비디아로부터 지금까지 12만 장의 GPU를 공급받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최근 칩 구매 규모를 연간 수십억 달러 수준으로 늘리며 추가 도입에 나섰다. GM은 자율주행차 개발 및 공장 자동화를 위해 엔비디아와 협력을 추진 중이며, 고성능 GPU 도입을 검토 중이다. 메르세데스-벤츠, 볼보 등도 엔비디아로부터 GPU를 일부 도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완성차 업계의 경쟁은 자율주행, 인공지능(AI) 비서 등 스포트웨어 정의 차량(SDV) 분야에서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이 경쟁을 위해서 필요한 게 고성능 AI 연산인데, GPU가 이 과정의 핵심이다. 자동차에는 수십 개의 센서와 카메라, 초정밀 지도, AI 판단 시스템이 실시간으로 작동하며, 이 모든 기능을 고도화 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GPU 같은 고성능 반도체다. 하지만 GPU는 공급이 수요를 쫓아가지 못해 품귀를 빚고 있다. 이러다 보니 GPU 확보는 완성차 기업의 기술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로 떠올랐다.
젠슨 황의 약속에 따라 엔비디아의 AI 칩셋 ‘블랙웰’ GPU 5만 장을 확보하게 된 현대차 역시 SDV 생태계 전환에 속도를 높일 수 있을 전망이다. 특히 현대차의 자율주행 기술 고도화도 탄력을 받게 됐다. 현대차의 현재 자율주행 기술력은 일부 글로벌 완성차 업체에 비해 뒤처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현대차는 2027년까지 레벨 2+ 수준의 자율주행 기능을 양산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혼다는 이미 2021년 일본에서 세계 최초로 레벨 3 기술을 탑재한 차량을 제한적으로 시판한 바 있다. 메르세데스-벤츠 역시 독일과 미국 일부 지역에서 레벨 3 인증을 획득한 '드라이브 파일럿(Drive Pilot)' 시스템을 상용화하며, 기술 격차를 벌리는 중이다.
현대차는 또 블랙웰 GPU를 활용해 차량 내 디지털 서비스도 고도화 할 계획이다. 개인화된 AI 비서, 몰입형 인포테인먼트, 운전자 상태 분석을 통한 ‘적응형 컴포트 시스템’ 등 AI 중심의 새로운 사용자 경험(UX) 개발 분야다. 또 자율주행차에 들어가는 전자제어장치(ECU)는 스마트팩토리 내 로봇과 센서에도 활용돼 기술 일관성을 높이고, 부품 호환을 통해 원가 절감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자율주행업계 관계자는 "향후 현대차가 확보한 GPU를 ‘AI 센터’ 또는 슈퍼컴퓨터급 연산 클러스터를 운영하거나, 기존 데이터센터를 업그레이드할 가능성이 클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호근 대덕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자동차 산업의 미래 경쟁력은 고성능 AI 반도체를 얼마나 안정적으로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다”며 “GPU는 SDV 시대의 ‘두뇌’이자 핵심 인프라다. 반도체를 빠르게 확보한 후 잘 활용하는 업체가 미래 기술을 선도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