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도곡동 주택가를 지나던 여성 조모(28)씨는 등 뒤의 헤드라이트에서 불길한 인상을 받았다. 아까 전부터 서행하며 자신을 따라오는 듯했기 때문이다. 일부러 도보 가장자리로 비켜줘도 차는 곧장 나아가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흘깃했으나 헤드라이트가 내뿜는 불빛에 눈만 부셨다.
본능적으로 어깨에 멘 핸드백 끈을 움켜쥐려는 찰나 차가 멈추더니 안에서 덩치 큰 남성 두 명이 달려들었다.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너무 놀라 얼어붙었을 때 그들 중 하나가 주먹으로 조씨의 명치를 때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팔목으로 조씨의 목을 조르며 차의 뒷좌석에 밀어 넣고는 청테이프를 뜯어내 양손을 결박, 눈과 얼굴에도 칭칭 동여맨 뒤 현장을 떠났다. 그러기까지 2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시야가 차단된 공포. 조씨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인지하지 못했다. 밀폐된 차 안에서 납치범들이 내뱉는 숨 냄새가 역할 뿐이었다. 살려 달라고 애원했으나 비웃음만 들렸다. 이윽고 차가 정차하더니 누가 자신을 밖으로 빼낸 뒤 둘러업었고, 이내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조씨를 가둔 곳은 다세대주택의 반지하방이었다. 퀴퀴한 곰팡내와 더불어 환기되지 못한 채 벽지에 눌어붙은 담배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거 뭐야, 당신 임신했어?”
납치범 중 하나가 비아냥거리며 물었다.
최초 피해자는 2월 10일 납치된 성모(25)씨다. 그때부터 강남경찰서 강력반엔 비슷한 신고가 계속 들어왔다. 동일 수법 피해자는 12명으로 추정됐다. 강도단이 몇 명인지 피해자마다 진술은 달랐지만 최소 4인 이상이라는 점에는 모두 동의했다.
피해자들은 모두 불운하게도 자정을 지나 강남 한복판을 거닐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질문을 들어야 했다. 그 새끼들 몇 살로 보였어요? 외모는? 은신처로 끌려갔다면서, 자세히 기억해봐요.
피해자들의 진술은 이따금 끊겼다. 보복 때문이다. 강도단은 피해자들의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까지 챙겨 갔다. 그래서 피해자들은 용기를 내 신고하러 왔음에도 조사 도중 자신이 한 말을 모두 주워 담고 싶어 했다.
한 여성은 심하게 몸을 떨었다. 자신의 신고 사실을 그들이 알아채지는 않을까. 그들이 자신을 찾아왔을 때 눈앞의 형사가 과연 도움될까. “더는 못하겠어요.” 피해자가 고개를 흔들지만 형사는 무시하고 묻는다. “그놈들 얼굴 기억해 보라니까. 목소리는 어린 것 같다며. 그런 걸 말해줘야 우리도 인상착의를 파악해 잡아낼 거 아녜요.”
성폭행 여부에 대해서도 피해자 진술은 엇갈렸다. 울분을 토하며 피해 사실을 털어놓는 여성도 있었고, 부모를 동반해 차분하게 설명하는 여성도 있었다. 하지만 시선으로만 말하는 여성도 있었다. 그 경우 조서에는 ‘핸드백, 신용카드, 지갑 등 강취당함’이라고 적혔다. 그 밖의 일은 기록에 남지 않았다.
분명한 사실은 강도단이 검은색 쏘나타나 뉴그랜저를 몬다는 것. 그리고 피해자 신용카드로 현금을 빼내고 나서야 다시 테이프로 눈을 가린 뒤 피해자를 차에 태워 경기 남부권에 내던지고 도망친다는 것이었다.
형사들 추측에 강도단은 급조된 조직인 것 같았다. 구성원도 감방 동기로 얽힌 막장들일 것이다. 학창 시절부터 폭행이나 상해, 본드 흡입 등 사고를 쳐서 강·폭력계 블랙리스트에 이름 한 줄은 기록된 수준.
강도단의 연고는 강동구 일대로 특정됐다. 피해자들의 돈이 인출된 ATM기 위치가 주로 강동구 명일역 부근에 집중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 강도단의 범행은 계속됐다. 4월 10일 새벽 1시, 서울 동대문구 장안동 골목 노상에서 여대생 이모(22)씨가 같은 수법에 당했다고 신고해왔다. 몇 시간 안 돼서 또 다른 피해자 성모(31)씨도 경찰서를 찾아왔다. 성씨는 같은 날 새벽 4시30분 역시 강도단에게 납치됐다고 했다.
시간상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다. 유사 범행이 벌어지는 건가 싶었으나 두 여성은 강도단의 은신처에서 만났다고 밝혔다. 그러니까 강도단은 이씨를 상대로 먼저 범행을 저질렀으나 학생 신분이어서 돈 될 게 없었고, 강남으로 다시 나가 성씨를 붙잡아온 것이었다.
극렬히 저항한 성씨는 유독 심하게 폭행당했다. 심지어 이씨가 보는 앞에서도. “같은 여자로서 무슨 말을 하겠어요.” 이씨는 악몽 같은 순간을 그렇게 회고했다.
다만 두 여성에게선 중요한 단서가 튀어나왔다. 다른 피해자들과 달리 강도단의 은신처를 정확히 기억한 것. 위치는 송파구 송파동의 한 다세대주택 반지하방이었다. 그곳 창문에 쇠사슬이 걸려 있던 것까지 기억했다.
하지만 강남경찰서 강력반이 움직인 건 두 달이나 지난 6월 17일이었다. 공교롭게도 경찰청이 ‘강력범죄 소탕 100일 작전’이란 이름으로 강력 사건 특별단속을 시행한 당일이다.
강력반이 형사기동대 차량을 타고 은신처를 급습했을 때 검거된 인물은 강도단의 막내 허모(23)씨 한 명뿐이었다. 그는 순순히 혐의를 인정했다. 피해자들도 취조실의 허씨를 보고는 강도단 조직원이 맞다고 증언했다. 다른 놈들은 어디 있느냐는 형사들의 추궁에 허씨는 오히려 되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