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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女만 13명 납치했다…'악마 4인조' 지하방서 벌어진 일

중앙일보

2025.11.05 12:00 2025.11.05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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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밤거리. 자정을 넘겨 이 일대를 지나는 여성은 강도단의 타깃이었다. 강도단은 검은색 쏘나타와 뉴그랜저를 번갈아 몰면서 피해자를 물색하고 다녔다. 연합뉴스
2003년 3월 17일 새벽 4시.

강남 도곡동 주택가를 지나던 여성 조모(28)씨는 등 뒤의 헤드라이트에서 불길한 인상을 받았다. 아까 전부터 서행하며 자신을 따라오는 듯했기 때문이다. 일부러 도보 가장자리로 비켜줘도 차는 곧장 나아가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흘깃했으나 헤드라이트가 내뿜는 불빛에 눈만 부셨다.

본능적으로 어깨에 멘 핸드백 끈을 움켜쥐려는 찰나 차가 멈추더니 안에서 덩치 큰 남성 두 명이 달려들었다.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너무 놀라 얼어붙었을 때 그들 중 하나가 주먹으로 조씨의 명치를 때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팔목으로 조씨의 목을 조르며 차의 뒷좌석에 밀어 넣고는 청테이프를 뜯어내 양손을 결박, 눈과 얼굴에도 칭칭 동여맨 뒤 현장을 떠났다. 그러기까지 2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시야가 차단된 공포. 조씨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인지하지 못했다. 밀폐된 차 안에서 납치범들이 내뱉는 숨 냄새가 역할 뿐이었다. 살려 달라고 애원했으나 비웃음만 들렸다. 이윽고 차가 정차하더니 누가 자신을 밖으로 빼낸 뒤 둘러업었고, 이내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조씨를 가둔 곳은 다세대주택의 반지하방이었다. 퀴퀴한 곰팡내와 더불어 환기되지 못한 채 벽지에 눌어붙은 담배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거 뭐야, 당신 임신했어?”

납치범 중 하나가 비아냥거리며 물었다.

최초 피해자는 2월 10일 납치된 성모(25)씨다. 그때부터 강남경찰서 강력반엔 비슷한 신고가 계속 들어왔다. 동일 수법 피해자는 12명으로 추정됐다. 강도단이 몇 명인지 피해자마다 진술은 달랐지만 최소 4인 이상이라는 점에는 모두 동의했다.

피해자들은 모두 불운하게도 자정을 지나 강남 한복판을 거닐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질문을 들어야 했다. 그 새끼들 몇 살로 보였어요? 외모는? 은신처로 끌려갔다면서, 자세히 기억해봐요.

피해자들의 진술은 이따금 끊겼다. 보복 때문이다. 강도단은 피해자들의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까지 챙겨 갔다. 그래서 피해자들은 용기를 내 신고하러 왔음에도 조사 도중 자신이 한 말을 모두 주워 담고 싶어 했다.

한 여성은 심하게 몸을 떨었다. 자신의 신고 사실을 그들이 알아채지는 않을까. 그들이 자신을 찾아왔을 때 눈앞의 형사가 과연 도움될까. “더는 못하겠어요.” 피해자가 고개를 흔들지만 형사는 무시하고 묻는다. “그놈들 얼굴 기억해 보라니까. 목소리는 어린 것 같다며. 그런 걸 말해줘야 우리도 인상착의를 파악해 잡아낼 거 아녜요.”


성폭행 여부에 대해서도 피해자 진술은 엇갈렸다. 울분을 토하며 피해 사실을 털어놓는 여성도 있었고, 부모를 동반해 차분하게 설명하는 여성도 있었다. 하지만 시선으로만 말하는 여성도 있었다. 그 경우 조서에는 ‘핸드백, 신용카드, 지갑 등 강취당함’이라고 적혔다. 그 밖의 일은 기록에 남지 않았다.

구 강남경찰서 건물 전경. 강력반 형사들은 승진하려면 제대로 된 성과를 내놔야 했다. 강도·절도 특별단속 기간 직전에 발생한 강도단 사건은 소위 한 건 해내는 작품으로 여겨졌다. 서울경찰청
분명한 사실은 강도단이 검은색 쏘나타나 뉴그랜저를 몬다는 것. 그리고 피해자 신용카드로 현금을 빼내고 나서야 다시 테이프로 눈을 가린 뒤 피해자를 차에 태워 경기 남부권에 내던지고 도망친다는 것이었다.


형사들 추측에 강도단은 급조된 조직인 것 같았다. 구성원도 감방 동기로 얽힌 막장들일 것이다. 학창 시절부터 폭행이나 상해, 본드 흡입 등 사고를 쳐서 강·폭력계 블랙리스트에 이름 한 줄은 기록된 수준.

강도단의 연고는 강동구 일대로 특정됐다. 피해자들의 돈이 인출된 ATM기 위치가 주로 강동구 명일역 부근에 집중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 강도단의 범행은 계속됐다. 4월 10일 새벽 1시, 서울 동대문구 장안동 골목 노상에서 여대생 이모(22)씨가 같은 수법에 당했다고 신고해왔다. 몇 시간 안 돼서 또 다른 피해자 성모(31)씨도 경찰서를 찾아왔다. 성씨는 같은 날 새벽 4시30분 역시 강도단에게 납치됐다고 했다.


시간상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다. 유사 범행이 벌어지는 건가 싶었으나 두 여성은 강도단의 은신처에서 만났다고 밝혔다. 그러니까 강도단은 이씨를 상대로 먼저 범행을 저질렀으나 학생 신분이어서 돈 될 게 없었고, 강남으로 다시 나가 성씨를 붙잡아온 것이었다.


극렬히 저항한 성씨는 유독 심하게 폭행당했다. 심지어 이씨가 보는 앞에서도. “같은 여자로서 무슨 말을 하겠어요.” 이씨는 악몽 같은 순간을 그렇게 회고했다.


다만 두 여성에게선 중요한 단서가 튀어나왔다. 다른 피해자들과 달리 강도단의 은신처를 정확히 기억한 것. 위치는 송파구 송파동의 한 다세대주택 반지하방이었다. 그곳 창문에 쇠사슬이 걸려 있던 것까지 기억했다.

강도단이 피해자들을 감금했던 송파구 송파동 다세대주택 반지하방. 곰팡내와 담배 냄새가 눌어붙은 좁은 공간이었으며, 피해자들의 도주를 차단하고자 창문에는 쇠사슬이 걸려 있었다. ytn 뉴스 캡처

하지만 강남경찰서 강력반이 움직인 건 두 달이나 지난 6월 17일이었다. 공교롭게도 경찰청이 ‘강력범죄 소탕 100일 작전’이란 이름으로 강력 사건 특별단속을 시행한 당일이다.

강력반이 형사기동대 차량을 타고 은신처를 급습했을 때 검거된 인물은 강도단의 막내 허모(23)씨 한 명뿐이었다. 그는 순순히 혐의를 인정했다. 피해자들도 취조실의 허씨를 보고는 강도단 조직원이 맞다고 증언했다. 다른 놈들은 어디 있느냐는 형사들의 추궁에 허씨는 오히려 되물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겁니까?”

(계속)

형사들을 얼어붙게 만든 단 한마디, 그리고 드러난 충격적인 범행 동기. 강남을 공포에 빠뜨린 4인조 떼강도의 실체, 아래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77706


안덕관([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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