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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남훈의 퍼스펙티브] 기업하기 좋은 환경과 경쟁력 확보해 새 기회 살려야

중앙일보

2025.11.06 07:24 2025.11.06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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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미 투자 약속, 우리에게도 기회 되려면
권남훈 산업연구원 원장
10월 29일 한·미 관세 협상의 세부 합의가 타결됐다. 아직도 남은 단계는 있지만 큰 틀에서 보면 걱정했던 불확실성은 거의 제거된 셈이다. 가장 우려했던 3500억 달러의 선불 현금투자 요구는 연간 200억 달러 내에서 10년간 분할 투자하는 수준으로 조정됐고, 나머지 1500억 달러는 재정 투입 없는 조선업 민간 협력 투자로 결론 났다. 불평등한 협상에 계속 끌려다닌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지만, 어려운 여건에서도 우리 경제가 감내할 수준으로 타결됐다는 긍정적 평가가 다수다.

그래도 이번에 우리는 일방적으로 손해를 강요당했고, 협상은 이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이었을 뿐이라는 시각이 일반적인 것 같다. 과연 그럴까. 애초에 자유무역협정(FTA) 무관세 상황에서 출발해 관세가 부과되고, 추가로 우리가 원하지 않았던 대규모 투자까지 요구받았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이번 투자 약속이 트럼프에 대한 조공일 뿐 우리에게 긍정적인 측면은 없을까.
대미 투자 급증한 자동차·반도체·배터리 산업, 국내 투자도 늘어
현지 생산으로 부품·중간재 수출 늘고, 시장 확대로 실적도 개선
대미 투자 펀드로 보조금 지급하되 사업 지분 대가로 받을 수도
해외 설비투자로 국내 고용 정체된 일본 전례 따라가선 곤란

외환보유액 운용에 미치는 영향
연간 200억 달러라는 숫자는 외환시장에 큰 영향을 주지 않고 정부가 조달할 수 있는 달러의 규모다. 한국은행의 외환보유액은 10월 말 기준 4288억 달러인데, 이를 운용하면 연 4~5% 정도는 이익을 얻을 것이므로 외환보유액에 손대지 않아도 200억 달러 중 대부분을 감당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외환보유액은 왜 유지해야 하는가. 간단한 답은 외환위기를 겪지 않기 위해서다. 외환시장의 급격한 불안에 대비할 수 있는 정도의 외환을 들고 있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는 1997년의 ‘IMF 외환위기’ 때 절실히 경험했다. 그래서 한국은행은 국내총생산(GDP) 규모의 7%나 되는 달러를 확보해서 언제든지 현금화할 수 있는 안전자산에 넣어두고 있는데, 이것이 외환보유액이다. 안전성과 유동성에 집중하다 보니 수익률이 낮을 수밖에 없는데, 국민연금 기금의 누적수익률이 평균 6.8%이고, 올해는 무려 20%에 달했음과 비교하면 적지 않은 기회비용을 치르는 셈이다. 우리 순대외금융자산이 1조 1000억 달러가 넘는 상황이라 외환위기를 그 정도까지 걱정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을 가지는 이들도 있다.

어쨌든 외환보유액을 운용해서 수익이 난다면 그 수익은 원래 어떻게 쓰였을까. 외환보유액을 더 늘리든가 외환시장에서 원화로 바꾸든가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외환보유액을 늘리면 수익성이 낮은 안전자산에 또다시 넣는다는 의미고, 원화로 바꾸면 환율에 대한 하향 압력(원화가치 상승)이 일어난다.

외환보유액을 더 늘릴 필요가 없고, 환율에 영향을 주고 싶은 생각도 없다면 좋은 방법은 수익성 높은 외화 자산에 재투자하는 것이다. 이번 협상에서 우리 투자에 대한 이자율은 20년 만기 미국 국채 수익률에 1.1%포인트의 추가 금리를 얹기로 했다고 알려진다. 우리 외환보유액의 상당 부분은 어차피 미국 국채에 투자되고 있다. 따라서 위험성이 크게 높지만 않다면 우리로서도 그렇게 나쁜 투자로 볼 일은 아니다.

물론 갑작스럽게 경상수지 적자가 연이어 발생한다면 경제의 여유 달러가 줄어들기 때문에 이런 구상도 어그러진다.

그러나 지난해의 우리 경상수지 흑자는 990억 달러였고, 대미 흑자는 1182억 달러에 달한다. 경상수지 흑자를 낸 것 자체가 미국에서 번 달러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대미 경상수지 흑자구조의 지속을 양국이 정상적인 상태로 받아들이고 새롭게 영향을 미치려고 들지 않는 한 큰 무리는 없으리라 본다.

투자의 ‘상업적 합리성’을 조건에 넣었다고는 하나, 트럼프가 사적 이익을 추구하거나 엉뚱한 투자를 남발할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 하지만, 만약 트럼프의 3년 잔여 임기 중에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20년까지 기다리지 않더라도 차기 미국 정부가 우리의 재협상 요구를 거절하기 어려울 것이다. 가능성이 더 높은 시나리오는 제조업 부흥을 목적으로 미국 내에서 설비투자를 할 때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이나 반도체·과학지원법(CHIPS법)과 같은 형태의 보조금을 대미 투자금으로 조성된 펀드에서 지급하되, 해당 펀드가 기업 지분을 대가로 받는 방식이다. 실제로 지난 8월 미국 정부는 CHIPS법에 따른 보조금 89억 달러를 인텔에 지급하고 그 대가로 약 10%의 지분을 확보한 바 있다.

인텔처럼 보조금 주고 지분 확보하면
김경진 기자
만약 우리 돈으로 조성된 펀드가 미국내 사업에 대해 사실상의 보조금을 지분투자 방식으로 지급하고 우리 기업도 그 수혜대상이 된다면 우리도 나쁠 게 없다. IRA와 CHIPS법이 어떤 효과를 가져왔는지 기억해 보자. 미국 내 반도체·배터리·청정에너지 등 설비투자가 크게 늘었고 우리 기업도 보조금 수령과 관련 수출의 증대 등으로 직·간접 혜택을 얻었다. 미국이 이번에 한국과 일본에서 확보한 9000억 달러는 IRA와 CHIPS법 보조금 예산의 두 배가 넘고, 투자 대상도 훨씬 광범위하다. 이 투자가 잘 활용된다면 우리 기업들에도 큰 기회 요인이 될 것이다.

국내 산업 공동화 가능성은 얼마나
중요한 문제가 하나 남아 있다. 트럼프의 의도대로 관세장벽을 높이고 투자를 끌어와 제조업 설비를 미국으로 이전시키는 데 성공한다면 국내 산업은 어떻게 될 것인가. 국내 대기업들은 이미 미국 설비투자를 활발히 해왔는데, 앞으로 이런 경향이 더욱 가속화될 수 있다. 가뜩이나 중국의 업체들과 버거운 경쟁 중인 국내 제조업이 공동화되고 수출과 고용에 타격을 입지 않을까 걱정되는 것이 당연하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이는 앞으로 우리 하기에 달려 있다.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해외 생산을 늘린다고 해서 국내 투자나 생산이 반드시 줄어들지는 않는다. 자동차·반도체·배터리 산업의 대미투자가 급증한 최근 몇 년 동안 중국과 기타 지역에 대한 투자는 줄었어도, 국내 투자는 오히려 늘었다. 이는 대부분의 경제학 연구와도 일치하는 결과다. 보통 해외에 제조설비를 세우면 부품이나 중간재 중 많은 부분을 국내로부터 조달하기 때문에 수출이 생각만큼 줄지 않는다. 현지에 밀착한 시장 확대와 타 제품으로의 파급 효과로 인해 실적이 오히려 개선되는 경우도 많다.

김경진 기자
세탁기의 경험이 좋은 사례다. 트럼프 1기인 지난 2018년 미국 정부는 대형 가정용 세탁기에 대해 긴급수입제한조치를 발동해 최대 50%까지 관세를 부과했다. 이후 2년 동안 세탁기 수출이 급감했지만, 부품 수출은 증가했고, 그 이후부터는 완제품과 부품 수출 모두 전보다 훨씬 늘어났다. LG와 삼성전자 등 우리 기업이 최신설비 현지 공장을 설립해 대응했고, 앞선 품질과 소비자 선호도의 증가로 시장 점유율이 크게 높아졌기 때문이다.

차준홍 기자
그래도 이번에는 부품을 비롯한 모든 제품에 관세를 부과하기 때문에 다르지 않을까. 아무리 관세를 넓게 부과해도 비교우위에 따라 현지 생산이 상대적으로 불리한 상품은 있기 마련이다. 국내 산업에 경쟁력만 있다면 수출 품목은 달라지더라도 전체적으로는 별 타격이 없을 수 있다. 오히려 문제는 규제 부담과 생산비용 증가로 국내에서 기업하기가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 사례에서 얻는 교훈
일본의 사례도 참고할 만하다. 일본은 1980년대부터 미국의 강한 통상압력을 받았고, 자율 수출규제(VER)나 플라자 합의를 통한 인위적 엔화 절상 등 고초를 겪었다. 이에 대응해 일본 제조기업들은 해외 설비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섰는데, 한동안은 국내 생산과도 선순환 관계가 유지되었다. 하지만 현지의 밸류체인이 완성되자 2000년대 이후부터는 국내 투자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비용 경쟁력의 차이를 언제까지나 감당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일본은 더 이상 상품의 수출이 아니라 해외투자 수익으로 돈을 버는 국가다. 상품수지는 이미 적자로 돌아선 상태지만 해외로부터의 소득은 늘고 있다. 기업 실적도 좋고 주가도 오르지만, 국내의 고용이나 임금은 정체 상태다. 인구의 감소로 실업문제가 없어진 일본인들은 그래도 큰 불만이 없어 보인다. 이런 미래를 우리도 받아들일 수 있는지는 생각해 볼 문제다.

3500억 달러 대미 투자 약속은 확실한 충격 요인이다. 하지만 우리가 일방적으로 치르는 비용이라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미국은 우리의 가장 큰 시장이자 협력 파트너다. 미국과 우리 모두 잘되는 투자는 충분히 가능하다. 그래도 이왕이면 우리의 이익을 극대화해야 하고, 그러려면 새로 열릴 기회를 잘 살리는 전략이 필요하다. 기업하기 좋은 환경과 경쟁력을 국내에 확보해야만 가능한 일임도 분명하다.

권남훈 산업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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