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기관은 자신의 힘을 크게 만들려는 속성이 있다. 힘이 셀수록 국민들을 위한 정책을 효율적으로 펼 수 있다는 명분에서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권력이 커진다고 꼭 국민들에게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국회가 한 예가 될 것이다. 국회는 과거 권위주의 시절에 ‘행정부의 시녀’라고 폄훼되었으나, 이제는 법률제정권과 예산 심의권 등을 활용해 행정부를 마비시킬 수 있을 정도의 힘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국민들의 국회에 대한 신뢰도는 바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국회의원들의 특권의식이 큰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올해 국감 “역대 최악” 평가 받아
의원 특권의식과 무책임만 부각
책임의식 없다면 300명 왜 필요
관용과 자제, 대화와 타협은 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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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 국정감사를 보자. 올해 국감은 중요 국정과제에 대한 내실 있는 토의는 없고 의원들 간의 저질 말싸움과 끝없는 정쟁, 상식을 벗어난 행동 등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장면만 보여주어 NGO모니터단으로부터 “역대 최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국회의원들은 무분별한 증인 채택과 과도한 자료 요구 등 과거의 악습을 그대로 재현하였고, 회의장에서도 고압적인 태도로 생산적인 토론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장관을 비롯한 피감기관 증인들은 물론, 공청회에 전문가로 초청된 분들에 대해서도 의원들과 의견이 다르면 말을 자르거나 무례하게 면박을 주기 일쑤였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국민의 대표’이니 맞서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지난 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거대 양당의 득표율 차이는 5.4%p에 불과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대부분 지역구에는 의원과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유권자도 많을 것이다. 진정한 국민의 대표라면 당연히 반대편 의견도 경청하는 것이 유권자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더욱 큰 문제는 의원들이 이처럼 특권의식은 있으면서도 권한에 따르는 책임의식은 없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모순된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 지난달 말 법제사법위원회의 대검찰청 국감장이었다. 증인으로 출석한 안미현 서울중앙지검 검사가 실무적으로는 검찰청 폐지 이후 검찰의 보완 수사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서 “(검찰 수사권 완전 폐지로) 만일 부작용이 일어나면 무리하게 입법을 하신 분이 책임을 지셔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가, 일부 여당 의원들로부터 “입법하는 의원들이 책임져야 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 “고개를 빳빳하게 세울 때가 아니다”는 등의 말로 집중포화를 맞았다. 사실 안미현 검사는 과거 강원랜드 채용비리 수사 때 검찰 수뇌부의 외압 의혹을 폭로하여 개혁 성향으로 알려져 있다. 이날 국감장에서도 “검찰 개혁의 동기나 방향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동의한다”고 밝혔지만, 여당 의원들은 작은 이견조차 용납하지 못했다. 권한과 책임이 같이 간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상식 아닌가.
이 같은 국회의원들의 권한에 대한 책임 의식 부재는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는 면책특권의 남용이다. 다른 민주국가에도 의원 면책특권은 있지만, 그 범위는 제한적이거나 명예 훼손은 제외하는 등 여러 통제장치가 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면책 범위가 훨씬 광범위하다. 아마도 과거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힘없고 정보 없는 야당에 최소한의 발언권을 보장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국회의 힘이 막강해졌는데도 불구하고 의원들은 면책특권을 이용해 근거 없는 허위 사실을 유포하거나 상대방을 음해하는 경우가 많다. 공인으로서의 책임감이 없는 것이다.
둘째, 입법에 대해 책임 있게 행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학자들은 자기 이름을 걸고 주장을 펴고, 정부 관리는 정책을 실행할 때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한다. 반면 국회는 다수결로 입법하므로 일반적으로 의원 개개인의 책임 소재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이런 점을 악용하여 당 지도부가 무리한 입법을 추진해도 자기 의견 없이 무기력하게 따라가는 의원들이 많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면 굳이 많은 세금을 써가며 국회의원을 300명씩이나 유지할 이유가 있는가. 300명 정원을 유지하는 이유는 다양한 전문성과 지역 여론을 반영하라는 뜻일 것이다. 만일 그 취지를 살리지 못한다면 국회의원 개개인을 헌법기관으로 만들어준 국민들에 대한 직무유기다.
물론 우리나라 국회는 민주화에 큰 기여를 해왔다. 지난해 12월의 황당한 비상계엄 사태 때에도 단시간에 해제요구 결의안을 통과시켜서 제 역할을 한 바 있다. 그러나 일부 의원들은 아직도 과거의 특권의식과 무책임한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제 입법부가 막강한 힘을 가진 상황에서 의원들이 무리를 계속한다면 국민들의 매서운 눈초리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난 4월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판결문에서도 “국회는 당파의 이익이 아닌 국민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야 한다는 점에서 소수의견을 존중하고, 관용과 자제를 전제로 한 대화와 타협을 통하여 결론을 도출하도록 노력했어야 한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국회의원들이 깊이 새겨야 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