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유산 종묘(1995년 등재) 맞은편 세운4구역 고층 개발과 관련해 유네스코가 세계유산영향평가(HIA, 이하 영향평가) 실시와 함께 서울시 측의 일방적인 개발 승인을 중단해달라고 요청했다. 지난달 30일 서울시의 관련 고시와 함께 시작된 ‘종묘 경관 훼손 논란’ 이후 유네스코의 공식 입장이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허민 국가유산청장은 17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 강당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유네스코 측이 현 상황에 대한 상당한 우려와 함께 (종묘 경관) 훼손 가능성을 지적하면서 영향평가를 반드시 철저하게 받을 것을 요청했다”면서 “해당 외교문서를 서울시에도 전달했다”고 밝혔다. 허 청장은 “문서에는 영향평가 결과를 세계유산센터에 제출하고 이후 센터 및 자문기구의 긍정 검토가 완료될 때까지는 (세운4구역 등의) 개발 승인을 중지해달라는 내용도 포함됐다”고 말했다.
세계유산 관리 행정 사무국인 세계유산센터(World Heritage Center·WHC) 명의의 문서는 주유네스코 대한민국 대표부를 거쳐 15일 국가유산청(이하 유산청)에 접수됐다. 유산청은 이를 17일 오전 서울시에도 전달했다.
이 같은 문서의 배경에 대해 유산청 측은 “제3자에 의한 민원이 접수된 상황에서 우리 정부의 의견과 추가 정보를 한 달 내 회신해달라는 요청이었다”고 설명했다. 세계유산 관리 차원에서 통상적으로 오가는 문서 중에서 이례적으로 강력한 메시지라는 의견도 덧붙였다.
유산청에 따르면 시민단체인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는 2023년에 이어 최근에도 종묘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에 부정적 영향이 우려된다며 유네스코 본부에 세운2구역과 4구역의 영향평가를 위해 방한해달라는 서한을 발송한 바 있다.
이에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이코모스)는 지난 4월 세운지구의 완전하고 포괄적인 영향평가 수행을 요청하는 문서를 보냈다. 하지만 서울시는 영향평가를 실시할 국내법적 근거가 없다며 이를 거부하고 세운4구역 건물 높이 기준을 최고 145m로 변경하는 내용의 ‘세운재정비촉진지구 및 4구역 재정비촉진계획 결정(변경) 및 지형도면’을 지난달 30일 고시했다.
허 청장은 이날 국내 기관이 영향평가를 임의로 거부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영향평가는 세계유산협약 당사국들이 유네스코 지침에 따라 준수·이행하는 국제 수준의 보존관리 제도”라면서 “(영향평가는) 세계유산 가치가 보호되는 선에서 공존가능한 개발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며, 국가유산청은 세운4구역 재개발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유산청은 이날 종묘의 중심 건물인 정전 상월대, 정문인 외대문, 종묘 상공에서 최고 145m 높이의 건물이 들어섰을 때의 가상 모습을 공개하기도 했다. “서울시가 주장하는 ‘그늘’과 ‘종묘의 경관 훼손’은 다른 개념이며 본래 논점을 흐리게 한다”는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다. 종묘는 “수백년간 완전함을 지켜오며 자연을 존중하는 경관과 정제된 건축에서 나오는 고요함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유산이자 명소”라는 사실도 강조했다.
영향평가와 별개로 종묘 관리에 대한 국내법적 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도 밝혔다. 허 청장은 지난 13일 종묘 사적 범위(19만 4000여㎡ 규모)를 세계유산지구로 지정한 사실을 언급하면서 “세계유산법의 하위 법령 개정을 서두르겠다”고 했다. 지난해 공포된 세계유산법은 세계유산지구에 대한 영향평가 의무화 등을 포함하지만 부처 간 이견으로 시행령이 계류되고 있다. 다만 해당 법은 세계유산지구 바깥일지라도 청장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영향평가를 요구할 수 있게 돼 있다.
지난 6일 서울시 조례 규정 삭제 관련 대법원 판결과 관련해선 법률 검토가 진행 중이라고 했다. 대법원은 서울시 의회가 문화유산 보존지역 바깥에서의 건설공사를 규제하는 조례 삭제가 위법이 아니라고 판결하면서도 유산청이 문화유산법에 따라 문화유산 보존을 위한 여러 행정조치를 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이종훈 역사유적정책관은 “문화유산법 12조에 선언적으로 언급된 내용인데, 이걸 향후 세운4구역 등에 적용해 유산청이 개입할 여지가 있는지 법률가들과 함께 들여다보고 있다”고 말했다.
허 청장은 “조속한 시일 내에 서울시, 문체부, 국가유산청 등 관계기관이 참여하는 조정회의 구성을 제안한다”고 했다. 조정회의에서 기존 71.9m 높이 기준을 고수할 것이냐는 질문엔 “열린 논의의 여지는 있지만 (서울시의 변경안인) 145m는 어렵지 않겠느냐”고 답했다. 그러면서 “20여년 간 협의해 온 것을 서울시가 갑자기 번복한 것을 이해할 수 없다”면서 오세훈 시장 측에 노골적인 유감도 드러냈다.
서울시는 2006년 세운재정비촉진지구(면적 43만8560㎡)를 지정하고 2009년 문화유산 현상변경허가를 신청했다. 이후 2021년까지 총 15차례 심의를 통해 이 가운데 세운4구역의 건물 최고 높이 기준을 종로변 55m, 청계천변 71.9m로 협의하고 2018년 사업시행인가, 2021년 변경인가까지 마쳤다. 이후 사업이 공전하는 상황에서 지난달 30일 최고 높이 기준을 종로변 101m, 청계천변 145m로 두배 가까이 높이는 변경 고시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