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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의 아트&디자인] 조각가 정현, 묵묵히 시간을 견뎌낸 것들의 힘

중앙일보

2025.11.17 07:08 2025.11.17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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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문화선임기자
참 특이합니다. 조각 전시를 보러 갔는데 전시장에 놓인 것들이 그냥 재료를 가져다 놓은 것인지 작가의 손을 거친 작품인지 알쏭달쏭합니다. 좌대 위에 있는 어떤 것은 날카롭게 툭툭 잘린 면을 그대로 드러내고, 어떤 부분은 둥글둥글 뭉치고 또는 이지러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에서 고개를 숙이고 입을 꾹 다문 사람 얼굴이 보이고, 얇은 옷자락을 늘어뜨리고 서 있는 관세음보살도 보입니다. 현재 서울 삼청동 PKM에서 열리고 있는 조각가 정현(69)의 개인전 ‘그의 겹쳐진 순간들’(12월 13일까지)엔 이런 조각이 즐비합니다.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계획하고 만들지 않는다”며 “그때그때 내 감정대로 흙을 던지고, 뭉치고, 다시 던지고 깎고 붙이며 완성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덩어리’들 앞에 서니 마음이 절로 경건해집니다. 미완성과 완성의 경계에 있는 듯한 작품들이 전하는 에너지가 꽤 묵직합니다.

정현, 무제, 1997, 브론즈, 56x27x20㎝. Edition of 3. [사진 PKM갤러리]
정현은 홍익대를 나와 파리국립고등미술학교를 졸업하고, 1982년 서울 원화랑 전시를 시작으로 30여년간 꾸준히 작업해온 조각가입니다. 90년대 초반에 그는 흙의 물성을 드러내는 기법으로 브론즈 인물 조각을 선보였습니다. 그리고 이후엔 오랜 세월을 견딘 재료를 통해 그 물질에 내재한 에너지와 시간의 흔적을 드러내는 작업을 해왔습니다. 이를테면 녹슨 철조망, 철길에 깔렸던 폐침목도 그에겐 중요한 재료입니다. “하찮은 것들이지만 시련을 겪고 남은 것들에 항상 끌린다”는 그는 “제가 감히 따라가지도 못하지만, 그것들이 겪은 시간과 시련을 보여주기 위해 갖다 놓게 됐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돌다리 ‘수표교(水標橋)’도 ‘견딤의 미학’을 보여주는 ‘걸작 중 걸작’으로 꼽습니다. 수표교는 본래 조선 1420년(세종 2년) 현재의 청계천에 세워졌지만, 1958년 청계천 복개 공사 때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졌지요. 정씨는 “수표교 하단 교각을 꼭 보라. 무심하게 다듬은 듯한 돌의 형태와 세월에 닳은 표면은 보면 볼수록 감탄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수표교에 빠져 주로 아날로그 도구로만 작업하던 그가 디지털 3D 스캐너로 석조 교각을 샅샅이 측정해 데이터를 얻고 새 작품에 녹여냈습니다. 야외 정원에 설치된 대형 조각 ‘무제’(2025)와 별관에 전시된 작품엔 수표교에서 그가 발견한 아름다움이 독특한 질감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정현은 “질감에 집착하는 사람”입니다. “재료 자체에 시간과 에너지가 응축돼 있다고 믿는다”는 그는 “질감이 정신이고 곧 역사”라고 말합니다. 불에 타버린 나무도 그냥 두지 못하고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사람. 이 조각가가 사랑하는 것을 넘어 추앙하는 것, 그것은 ‘자연’과 ‘시간’, 그리고 ‘견딤’이 아닐는지요.





이은주([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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