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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혜의 시선] 공직사회라는 초가삼간

중앙일보

2025.11.17 07:18 2025.11.17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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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혜 외교안보부장
# “저 앞으로도 대통령 최소 세 번 바뀔 동안은 회사 다녀야 해요. 이런 건 시키지 말아 주세요.”

윤석열 정부 출범 직후 한 중앙 부처의 중간 관리자급 공무원이 다소 예민한 사안과 관련한 상사의 지시에 내놓은 답이다. 상사는 말문이 막혔지만, 딱히 꾸짖지 않고 그냥 “그만 나가 보라”고 했다고 한다. 전임 정부에서 청와대 지시에 따라 이뤄졌던 조치들에 대해 새 정부가 들어선 뒤 ‘회사’의 입장 자체가 달라지고, 감사까지 이어지며 뒤숭숭해진 조직 내 분위기를 모르지 않아서였다.

내란 가담 공무원 조사 TF 출범
지시 이행 실무진 책임까지 물은
마구잡이 적폐 청산 반복 우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6일 소셜미디어 엑스(X)에 ″신상필벌은 조직 운영의 기본 중 기본″이라는 글을 올렸다. 이재명 대통령 엑스(X) 캡처

# “요새 국장 방 들어가면서 녹음 안 하면 바보라는 소리 들어요.”

문재인 정부 당시 또 다른 한 중앙 부처 주니어 공무원이 귀띔해준 이야기다. 문재인 정부 들어 ‘적폐 청산’이 대대적으로 이뤄지고, 지시를 따랐을 뿐인 공무원 여럿이 감사나 조사, 수사 대상이 됐을 때 일이다. 시키는 대로 할 땐 하더라도 지시를 내린 정확한 ‘윗선’이 어디인지 증거를 확보해 놓아야 정부가 바뀐 뒤에도 피해를 보지 않는다는 설명이었다.

안타깝게도 정권 교체 뒤 대한민국 공직 사회에서 반복되는 현상이다. 내란 관여 공무원 조사 기구인 ‘헌법존중 정부혁신’ 태스크포스(TF) 출범을 보며 걱정부터 앞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신상필벌은 조직 운영의 기본 중 기본”이라는 이재명 대통령의 입장(16일 엑스에 올린 글)은 맞다. 비상계엄 선포 사태에 가담한 공무원이 있다면 찾아내 조치를 취하는 게 국민을 섬기는 공무원들이 본분을 지키며 일하도록 하는 길이 될 것이다.

다만 과거의 사례를 보면 이런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공직 사회 전체가 상처 입는 상황이 벌어지곤 했다.

지위와 서열에 따른 공직 사회의 지휘 체계는 확고하다. ‘회장님’으로 부르는 대통령, ‘사장님’으로 부르는 장관의 지시에 대한 불복은 상상하기도 어렵다. 정부가 바뀌어 사후에 책임을 묻더라도 정책 결정 과정에 직접 관여한 고위 공직자라면 모를까, 지시를 이행한 실무진을 대상으로 문제를 삼는 건 순리에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은 이를 무시했다. 국장의 개인 수첩까지 털어갔고, 과장을 불러 왜 그런 지시를 그대로 따랐느냐고 따져 물었다. 많은 공무원이 정상적 지휘 체계에 따라 내려온 지시를 충실히 이행했다는 이유로 적폐 세력으로 몰려 수모를 당했다. 관가에는 조사 대상이 수천명에 이르는 ‘저인망식 털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돌았고, ‘열심히 일할수록 피를 봤다’는 정서가 퍼졌다.

이재명 정부에선 이번 TF가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위원회와는 다르다고 선을 긋는다. 계엄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일부만 조사 대상이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그 방식을 보면 걱정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이번 TF 활동의 목표가 인사 조치라는데, 정작 전임 정부의 장·차관 등 고위직 상당수는 이미 수사를 받고 있다. 결국 인사 조치의 대상은 실무진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솎아내기’ 아니냐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또 내부 제보를 통해 제기된 ‘의혹’도 조사 대상이 된다는 점은 이해관계에 치우쳐 근거가 부족한 투서로 자칫 곤욕을 치르는 사람이 생길 수 있다는 뜻도 된다. 개인 휴대전화 제출에 협조하지 않을 경우 대기발령·직위해제 뒤 수사 의뢰 가능성도 열어놨다. “전에도 개인 폰 제출 압박은 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하겠다는 건 또 처음 본다”는 한 공직자의 말에선 허탈함이 느껴졌다.

TF 활동으로 인사 절차가 중단될 경우 또 다른 여파도 우려된다. 집중 조사 대상인 외교부의 경우 본부 국·실장 인사와 공관장 인사가 연동돼 있다. 지난 6월 말 특임공관장 전원을 소환해 172개 재외공관 중 40곳에서 다섯 달째 공관장이 없는 상태다. 한국인 근로자가 대량 감금될 때 미 애틀란타 총영사도, 한국인 대학생이 고문 끝에 살해당할 때 캄보디아 대사도 공석이었다. 재외 국민이 피해를 입는 사건 사고가 세계 각지에서 터지는데, 이들을 보호하는 전초기지 격인 재외 공관의 리더십 공백이 수개월 더 이어질 수 있는 셈이다.

김민석 국무총리가 18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계엄 세력과의 단절은 꼭 필요하다. 하지만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개인 휴대전화도 내라면 군말 없이 내는 힘없는 존재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 초가삼간을 구성하는 공무원 하나하나가 이재명 정부를 떠받치는 기둥이기도 하다. 이들이 지시 하나하나에 뒤탈부터 걱정한다면, 혹은 다음 정부에서 다치지 않을 생각부터 한다면, 이재명 정부의 성공도 멀어질 수밖에 없다.





유지혜([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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