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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종묘를''반드시 고층' 둘 다 틀렸다…현장서 본 종묘 해법 [문소영 논설위원이 간다]

중앙일보

2025.11.17 07:26 2025.11.17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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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운상가 재개발 종묘 훼손 논란, 해법은 없나
문소영 논설위원
종묘부터 남산까지 길게 뻗은 공원으로 녹지 축을 만들고 그 양옆에 고층건물을 배치하면 “오히려 종묘가 더욱 돋보일 것”이라는 서울시와, 종묘에서 고층건물이 바라다보이면 “유네스코 세계유산 1호의 가치가 훼손된다”며 “모든 조치를 다해 막겠다”는 문화체육관광부·국가유산청이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적 선동과 잘못된 정보가 온라인에 퍼지면서 논쟁은 감정싸움으로 번지는 상황이다. 소셜미디어에 자주 등장하는 대표적 오류 두 가지를 짚어본다.

반드시 고층 개발이 능사 아냐
유산 많은 유럽, 저층 고밀 개발

종묘 동쪽에 이미 고층 보여
“과한 신성시, 시대 착오” 시각도

“북쪽은 더 낮게, 남쪽은 더 높게”
유연한 세운상가 재개발 제안도

종묘 북쪽 경관은 안 해쳐
김경진 기자
첫째, 종묘의 핵심 건축물이며 역대 임금의 신위가 봉안된 정전(正殿) 위로 고층건물이 우뚝 솟은 합성 이미지가 ‘재개발 후 종묘 모습’이라며 돌고 있다. 건축 거장 프랭크 게리가 “무한의 우주가 느껴진다”고 격찬한 정전의 길고 장엄한 수평 건축의 아우라가 깨지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정전 뒤 북쪽은 창경궁이므로 개발 가능성이 전혀 없다. 논란의 세운상가 재개발 구역은 정전에서 남쪽으로 500m 떨어져 있고 종묘 남단의 외대문(정문)에서도 180m 이상 이격돼 있으며, 그 사이엔 1985년 조성된 종묘광장공원이 있다.

김경진 기자
다만 서울시 구상대로라면 정전에서 남쪽을 바라볼 때 공신당(종묘 내 사당)과 수목 너머로 더 높은 건물들이 보이게 된다. 국가유산청은 이것이 종묘의 “고요한 공간 질서”를 훼손할 것이라고 우려한다. 서울시는 세운4구역의 높이를 종묘 쪽 101m(24~28층), 청계천 쪽 145m(34~38층)까지 올리길 원한다. 국가유산청은 기존 심의 기준대로 각각 55m(13~15층), 71.9m(17~20층) 이하로 제한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김경진 기자
기자는 최근 종묘를 방문해 정전의 장대한 월대(月臺)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았다. 정전을 등지고 남동향을 바라보면 보령빌딩(18층), 하나손해보험(12층), 효성주얼리시티(19층) 등이 눈에 들어온다. 이미 도심 스카이라인이 부분적으로 침투한 상태이다. 서울시 청사진대로라면 이들의 2배 높이 건물들 몇 개가 추가로 시야에 포함될 것이다.

둘째, 서울시 구상처럼 반드시 고층 재개발이어야 수익성이 보장된다는 주장 또한 다양한 방식의 재개발에 눈 감은 일방적인 시각일 수 있다. 건축가 황두진은 “저층이면서도 용적률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 유럽식으로 건폐율(대지 면적 대비 건물이 지면을 차지하는 비율)을 높여 필지를 촘촘히 채우면 된다”고 말한다. 그는 현대건축과 한옥의 조화 및 도시재생에 큰 관심을 가지고 관련된 저서를 여러 권 내기도 했다.

황 건축가는 “프랑스 파리는 5~6층 건물이 대부분인데도 평균 용적률이 서울보다 높다는 통계가 있다”며 “(2017년) 세운4구역 재개발에 대한 국제공모 당선안 역시 유럽식 저층-고건폐율 방식이었다. 낮고 두툼한 매스를 채우되 공극(빈틈)을 곳곳에 배치해 답답하지 않고 풍부한 거리 경험을 제공하는 설계였다. 아마 내가 설계했어도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반면에 오세훈 시정의 구상은 고층-저건폐율 방식”으로서 “넓게 비우고, 높게 올리고, 그사이에 종묘와 남산을 연결하는 거대한 녹지 축을 관통시키는 계획”이라고 황 건축가는 설명했다. “지금의 세운상가 자리에 그 녹지 축이 들어선다. 세운상가를 철거하려면 재산권 보상 비용이 늘고, 이를 상쇄하기 위해 건물 높이가 올라갈 수밖에 없다.” 그는 녹지 축이 “거대한 스케일의 서사이자 랜드마크”가 될 수 있지만 “역사적 맥락과 단절될 우려”도 있다고 지적한다.

다양한 토론에 마음 열어야
서울시가 2023년 발표한 세운재정비촉진지구 개발 이후 예상도. 남쪽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북쪽 끝에 종묘가 보인다. 워싱턴DC를 연상시키는 녹지 축이 핵심이다. [사진 서울시]
세운상가 재개발 논란은 ‘조선 왕실의 위패가 모셔진 신성한 유산을 훼손하는 난개발’과 그 반대편의 ‘조선의 향수에 사로잡혀 주민 고충을 무시하고 세운상가를 슬럼화시키는 고집’으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미국 워싱턴 DC처럼 거대 녹지 축이 관통하는 가운데 넓게 비우고 높게 올리는 모델과, 파리처럼 낮고 촘촘한 스카이라인을 유지하는 모델 가운데 어떤 방식이 종묘의 가치와 도시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하는지를 놓고 다양한 가능성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

서예가이자 현대 미술가인 김종원 전 경남도립미술관장은 “정부 관료들이 종묘의 신성성과 민족정기를 논하며 신비주의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전통은 계속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종묘가 과거의 시대정신인 유교 미학의 최정점이라면 이것이 현대의 시대정신과 맞닿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유럽의 오래된 성당도 이제 종교적 체험보다 심미적 체험의 대상이고 종묘도 그렇다. 서울시의 계획이 과연 심미적 체험에 최선인지 차분히 따져보되, 정치 논리나 ‘무조건 보존’이라는 교조성은 배제해야 한다”고 했다.

디자인 평론가 최범 역시 “종묘 문제를 민족 정체성과 직결시키는 건 무리”라면서 “우리는 대한민국이지 조선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다만 국가 정체성과 문화유산 존중은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며 “종묘의 신전 건축으로서의 독특하고 탁월한 미감과 영적 분위기는 여전히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문화유산 정책은 핵심 가치의 보존과 활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이라며 “종묘의 주된 가치가 그 안에서 보는 경관에 있다면 바깥의 고층건물이 안 보이는 쪽이 좋을 것이다. 반면에 그 가치가 ‘도심 속 숲에 둘러싸인 비밀스러운 공간으로서의 분위기’에 있다면 주변에 고층빌딩이 있어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또한 경제적 차원에서도 고층 개발로 얻는 이익과 장기적 관광·문화적 손실을 비교해야 한다고 했다.

종묘 정전의 모습. 정전 뒤는 창경궁이므로 고층건물이 들어서지 않는다. 문소영 기자
정부와 여당은 1995년 종묘의 유네스코 등재 당시에 ‘세계유산구역 내 경관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근 지역에서의 고층건물 인허가는 없음을 보장할 것’을 유네스코가 분명히 명시한 바 있다며 서울시의 재개발이 유네스코 등재 취소를 불러올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이에 대해 ‘유네스코에 너무 집착한다’는 일각의 지적도 나오고 있다.

독일 엘베 계곡 유네스코 지위 포기
황 건축가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지정 시스템에 비판적인 시각도 세계적으로 존재하는 게 사실”이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되면 도시가 박물관화되어 정상적인 발전을 저해한다는 의견도 있다. 등재가 취소된 독일 드레스덴 엘베 계곡의 경우, 유네스코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시민 투표로 다리 건설을 감행한 것”이라고 밝혔다.

드레스덴 엘베 계곡은 자연과 역사가 어우러진 ‘문화 경관’으로서 200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그러나 엘베 강을 사이에 둔 지역 간에 심각한 교통난이 계속되자 시 정부는 강을 가로지르는 발트슐뢰스헨 다리를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유네스코는 다리가 경관을 훼손할 것이라며 세계유산 등재를 취소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2005년 주민 투표에서 약 67%가 다리 건설에 찬성했고 이에 따라 드레스덴 시는 건설을 강행했다. 그러자 유네스코는 2009년 등재를 취소했다. 이후 여러 설문 조사에서 주민들의 과반수는 다리 건설 지지를 후회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독일 드레스덴 엘베 강을 가로지르는 발트슐뢰스헨 다리. 이 다리가 건설 중이던 2009년 드레스덴 엘베 계곡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지위를 잃었다. 그전부터 유네스코의 등재 취소 경고에도 2005년 드레스덴 주민투표 결과 67% 이상이 다리 건설을 지지함에 따라 다리가 건설되었다. 사진 위키피디어
황 건축가는 “드레스덴 엘베 사례도 있지만 여전히 유네스코 의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한국은 근대화 과정에서 많은 문화재를 잃었고 또 식민지 시절을 거쳤기 때문에 역사적 상실감이 국민 정서에 많이 배어 있다. 유네스코 등재는 그런 역사적 상실감을 보상해온 측면이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종묘 쪽 건물은 좀 더 낮추고 뒤는 좀 더 높이는 방식으로 충분히 조율이 가능하다”며 서울시와 정부가 정쟁을 멈추고 토론과 협상을 할 것을 촉구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설계한 홍익대 건축과 민현준 교수 역시 “북쪽의 창덕궁과 창경궁에서 종묘를 지나 세운상가 구역으로 이어지는 전체 스카이라인을 생각해야 한다”며 “애초에 반대 측과 의견 조율을 해가면서 종묘에서 멀어질수록 건물의 높이가 높아지는 방식을 취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논란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 같다”고 평했다.



문소영([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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