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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민주주의 정착해 성장, 이젠 정치개혁·균형발전 이뤄야

중앙일보

2025.11.17 07:28 2025.11.17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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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 이상이었던 지난 80년, 향후 발전 방향은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1980년대는 자유화와 민주화의 시대였다. 80년 폴란드에서 독립자치노동조합인 ‘연대’(소위 ‘자유노조)가 조직되면서 동유럽에 자유화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아시아에서는 86년 필리핀에 이어 한국에서 87년 민주화가 이루어졌지만, 72년 계엄령과 이후 15년 간 엄혹한 전체주의를 경험했다.

불편했던 동맹관계
미국을 비롯한 자유 세계의 우방국들에게 한국의 전체주의 체제는 우호 관계를 지속하기에 불편한 조건이었다. 데탕트 시기 아시아 주둔 미군이 감축되면서 미국의 안보공약이 축소되었고, 안보 공백을 막기 위해 동서 진영 간의 긴장을 완화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한국과 필리핀의 지도자는 계엄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다.

박정희 유신 불편했던 미국, 카터 정부 들어 주한미군 철수 움직임
전두환 정부는 지속성 의문…북 대치 남한의 최대 무기는 민주주의
87년 미 보고서, 불균형 발전 등 이유 스페인·대만보다 부정적 평가
40년 전 전망 빗나갔지만 문제의식은 유효…문제 해결 서둘러야

1960년 4·19혁명은 불의에 맞서는 한국 민주화운동의 마중물 역할을 했다. 혁명 당시 거리를 가득 메운 시위 인파. [중앙포토]
인권 탄압 국가로 비판받았던 한국과 필리핀과의 관계는 미 의회와 언론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트남 전쟁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난 군사비를 감축하기 위해 미국 정부는 군사원조의 감축, 궁극적으로 양국에 주둔한 미지상군을 철수하려고 했다.

안보공약이 줄어든 만큼 긴장 완화를 위해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지만, 한반도에서는 북한과의 대치가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군의 자체 안보력 강화가 필요했다. 한국군 현대화를 계획했고, 한국이 스스로 군수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일부 제한을 풀었다. 그러나 이 모든 계획의 재정적 뒷받침을 위해서는 미 의회의 승인이 필요했다.

한국식 해결법: 코리아게이트
이러한 상황에서 76년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 정부의 미국 의원들에 대한 불법 정치자금 지원, 한국 정부를 비판하는 교포들에 대한 불법적 사찰이 밝혀진 것이다. 미국의 쌀 수입 과정에서의 리베이트와 통일교가 개입된 의회 로비 등도 코리아게이트의 중요한 내용이었다.

60년대와 달리 70년대 주미한국대사관의 문서들에는 미 의회 의원들의 동향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들이 포함되어 있다. 물론 군사원조 축소에 대해 한국 정부가 항의할 때마다 미국 정부는 의회의 한국 지원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핑계로 댔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타났던 현상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77년 인권외교를 내세운 카터 행정부가 들어선 것은 한·미 동맹에 더 큰 문제가 되었다. 카터는 선거 과정에서부터 주한미지상군의 전면 철수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결국 미국의 군부와 대통령 외교안보팀의 반대로 철수계획은 철회되었지만, 79년 10월까지 미국 정부는 한국 정부가 반대했던 남·북·미 3자회담의 개최를 계속 압박하였다.

전두환 정부의 등장도 정치적으로 볼 때 미국의 입장에서 그리 반갑지 않았다. 민주화의 열망을 유혈사태로 억누르고 등장한 전두환 정부의 지속가능성에 의문이 있었다. 일본군에서 훈련을 받았던 박정희와는 달리 해외에서의 경험이 없는 전두환의 경력을 문제 삼기도 했다. 물론 일시적인 사회적 안정과 핵개발 포기, 그리고 금융시장을 비롯해 한국 시장의 대거 개방은 환영할 만했다.

1987년 6·10 민주항쟁 당시 숨진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 대학생과 시민 등 100만여 명이 모였다. [중앙포토]
민주화와 사회안정: 두 마리 토끼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87년의 민주화는 한국에는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과의 관계를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였다. 더 이상 여론과 의회가 인권문제로 한미동맹을 비판하지 않았다. 그러나 민주화가 가져올 수 있는 또 다른 상황에 대해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주화가 가져올 불안정성 문제였다.

이미 한국은 60년 4·19 혁명을 통해 한 차례의 민주화를 경험했다. 미국도 4·19 혁명을 환영했다. 50년대의 부패한 구조 속에서 미국의 원조가 효율적으로 사용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북한과의 대결 속에서 남한이 가진 가장 중요한 무기는 민주주의라고 판단했다. 그럼에도 안심할 수 없었다.

4·19혁명과 87년 민주화
민주화는 일시적으로 사회적 불안정을 가져올 수 있었다. 중앙 정부의 리더십 약화로 효율적인 거버넌스를 유지하기도 쉽지 않았다. 다양한 방면에서 억눌려 있었던 사회적 요구가 분출되면서 사회적 불안정에 대한 국민의 불만도 높아졌다. 4·19 당시 미국 정부는 민주화된 정부가 오래 가지 못할 것이기에, 새로운 리더십의 필요성에 대해 다각도로 고민했다.

87년은 두 번째 민주화의 경험이었다. 대통령 선거 일주일 전인 87년 12월 9일 미국 국무부에는 정보연구보고서(Intelligence Research Report) 137호가 제출되었다. 한국의 민주화 이후 상황에 대한 전망이었다. 이 보고서는 한국의 상황을 민주화가 진전된 스페인과 대만, 반미 정부가 들어선 이란과 니카라과의 사례와 함께 비교했다.

미국의 관점에서 이란과 니카라과는 실패한 경우였다. 79년 독재의 붕괴가 반미 정부의 등장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물론 한국에서 반미 정부가 들어설 가능성은 없었다. 한·미 간의 안보동맹이 한국의 생존에 필수적인 조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국무부의 보고서는 한국의 미래에 대해 그다지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다.

균형발전이 이루어졌던 스페인
점진적 민주화에 성공한 스페인과 비교할 때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우선 정치적으로 볼 때 정부와 국민 사이를 조율할 ’중간 조직‘이 존재하지 않았다. 중간 조직은 정부와 국민의 합의를 만들어낼 수 있지만, 40여년 간 전체주의를 경험한 한국에는 합리적 노동조합과 지방정부가 부재했다. 이로 인해 극단적인 정치세력들이 힘을 얻을 가능성도 있었다. 정당도 정책보다는 개인 정치인에 의존하고 있었다.

두 번째 차이는 불균형적인 지역발전과 급속한 도시화의 문제였다. 중산층의 형성은 민주화의 중요한 조건이었지만, 주요 산업과 서비스가 몇 개의 도시에 밀집되면서 수백만의 농민들이 도시로 이주했고, 70%의 인구가 도시에 살고 있었다. 80년대 한국의 상황은 도시 인구가 20%에 지나지 않았던 50년대와는 완전히 달랐다.

한국 정부가 추진하고 있었던 최저임금, 국민연금, 의료보험의 확대 등의 사회안전망이 불안정성과 극단적 정치화의 위험을 낮출 수도 있지만, 도시의 과대 인구에 적절한 일자리가 보장되지 않을 때 극단주의와 포퓰리즘이 등장할 수 있는 조건이 될 수 있었다. 스페인은 지방의 산업과 서비스가 도시 지역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민주적이고 조화로운 유럽 사회가 주변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도 큰 차이였다.

이란과 니카라과의 실패 역시 지나친 도시화에 연유한다고 판단했다. 이란의 경우 도시 인구는 10년간 2배로 증가했고, 이들에게 적절한 일자리는 늘어나지 않았다. 니카라과의 실업자들은 결국 혁명군이 되었고, 이란의 젊은이들은 종교지도자들에게 의존했다.

한국과 달랐던 대만
위안이 되는 점은 당시 한국의 경제적 불평등이 다른 국가에 비하여 아직은 상대적으로 크지 않다는 점이었다. 농지개혁으로 농민들의 농지 소유 비율이 70% 이상으로 상승했다는 점도 상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중공업으로의 전환 과정에서 농업과 경공업의 적절한 균형 발전에는 실패했다. 사람들을 지방에 묶어둘 수가 없었다. 빈부 격차는 점차 늘어났다.

이는 대만과도 비교되는 것이었다. 70년대까지 대만의 평균 농업 소득은 한국의 두 배에 가까웠다. 대만은 농업생산량이 높았으며, 식량 수입이 줄면서 외채를 절약할 수 있었다. 70년대 대만 농촌의 비농업 소득이 55%였는데, 한국은 18%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농민조합과 같은 풀뿌리 조직이 탄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86년 대만의 외채는 148억 달러, 외환보유고는 600억 달러. 한국은 외채 445억 달러에 외환보유고는 76억 달러였다.

결국 민주화 이후 한국이 안정되려면 경제적인 집중을 억지해야 한다는 처방을 내렸다. 지방에 산업과 서비스를 재배치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책 없이는 정치적 극단화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보고서의 교훈
현재의 한국을 본다면 87년의 부정적 전망은 잘못된 것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성숙하고 지속가능한 민주주의 체제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속에서도 한국은 5번에 걸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했다. 분명 한국은 지난 80년 동안 기대했던 것보다 더 잘하고 있다.

그럼에도 현재 나타나고 있는 정치적 극단화와 분열, 정치적 합의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상황을 고려한다면, 87년 당시의 전망은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다. 대만과의 비교 부분에서 97년 금융위기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정치적 중간 조직과 정당의 역할, 그리고 지방 균형 발전의 필요성에 대한 40년 전의 지적은 지금도 가장 고민이 큰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격언을 생각해야 할 때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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