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훅 들어온 AI와 기대 이상으로 늘어난 수명 탓에 사회가 정한 낡은 생존 방정식이 무용지물이 돼버린 전인미답의 길 위에서, 우리가 불안을 줄이며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엔진은 뭘까요. 많은 전문가는 '질문'을 꼽습니다. 질문만이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인생을 재정의하는 통찰에 다가설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질문하는 인생' 시리즈는 다른 이들의 질문을 통해 내 질문을 찾아 나서는 여정입니다. 오늘은 10년 전 유료 콘텐트 구독 플랫폼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퍼블리의 박소령 전 대표입니다.
박소령 전 퍼블리 대표 인터뷰
서울대 경영학과, 세계적 컨설팅업체 맥킨지 거쳐 하버드 케네디 스쿨 졸업. 국내 유력 일간지 공채 기자 합격. 30대 초반 커리어 끝판왕이 지난 2015년 서울 성수동 스타트업 공유 공간 카우앤독에서 "딱 1년만"이라는 마음으로 지식 콘텐트 스타트업 퍼블리를 창업했다. 돈 내고 구독하는 콘텐트 '퍼블리 멤버십'(2017)은 비슷한 모델을 고민하던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2021년 성장성·성과 모두 인정받은 스타트업이 받는 시리즈 B 투자로 이어지며 승승장구하는 줄 알았는데, 불과 3년 뒤인 2024년 8월 주식회사 퍼블리 서비스를 두 개로 쪼개 각각 다른 회사에 매각한 후 퇴사했다.
한국에 없던 비즈니스 모델을 내놨던 박소령(44) 전 퍼블리 대표 얘기다. 그가 이번엔 한국에 없던 책을 냈다. 실패 고백록『실패를 통과하는 일』이다. 잘 나가는 최고경영자(CEO)였던 시절에도 서울 테헤란로의 스타트업 전문 정신과에 다닐 정도로 고통받았던 실패의 순간을 담담하게 풀었다. 손에 쥔 돈 거의 없이 퇴사한 지 3개월 지나도록 머릿속을 가득 메운 과거 잘못된 의사 결정을 복기하고 털어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썼다고 한다. 지난 9월 25일 그를 만나 책보다 더 솔직한 얘기와 인생을 뒤흔든 결정적 질문을 듣고, 그의 시각에서 정리했다. 안혜리 논설위원
나는 누구인가
퇴사를 확정 짓는 물리적 도장은 2024년 8월 찍었지만. 지난 3월 20일 새벽 4시『실패를 통과하는 일』초고를 마친 순간에야 "와, 퇴사했네" 싶었다. 비로소 심리적 도장을 찍은 느낌이었다.
'실패'를 내세운 책 제목은 출판사가 제안했다. 아무리 실패가 공유할만한 가치 있는 자산이라지만, 여동생이 "이게 진짜 제목은 아니지?"라고 물을 만큼 주변 우려가 컸다. 하지만 구질구질한 변명 없이 깔끔해 난 오히려 좋았다. 실패가 맞으니까. 투자자에게 손해 끼쳤고, 레이오프·매각으로 동료에게 상처 줬으니까.
『블리츠스케일링』·무제한 휴가
독이 된 실리콘밸리 따라하기
경고 불구 시리즈 B 함정 빠져
'납득할 수 있는 실패' 위해 기록
다만 실패도 다 같은 실패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주도권 쥐고 심사숙고해 저지른 실패는 '후회 없는 실패', 다시 말해 납득할 수 있는 실패다. 반면 주체적으로 결정 안 하고 외부 환경에 휩쓸려 남들 좋다니까 맹목적으로 따라 하다 잘못된 건 '후회하는 실패'다. 돌이켜보니 후회하는 실패 투성이다.
책 좋아하는 난, 좋은 콘텐트가 인생을 바꾼다는 신념으로 창업했다. 목적지를 향하는 줄 알았는데 엉뚱한 미로 속을 헤매고 있었다. 주도권이 나한테 하나도 없었다. 난 내 삶의 주인이 아니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영화 '매트릭스' 속 진실은 알려주지만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빨간 약을 먹은 것처럼 현실을 마주했다. 너무 불행했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내가 진짜 원하는 건 무엇인지 계속 물었어야 했다.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나, 의무감으로 하나. " 정신 차려보니 좋아하는 콘텐트는 버리고 엉뚱하게 한 번도 원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원하지 않을 채용 사업에 매진하고 있었다.
내가 아는 나는, 미래의 불확실한 큰돈보다 현재의 가치가 더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정반대로 행동했다. 다행히 2023년 어느 날 잠시 멈춰 "만약 내 인생에 남은 시간이 5년, 3년, 아니 1년이라면 이 일을 계속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답은 "노"였다.
잃어버린 나를 다시 찾아야 했다. 주도권을 되찾는 방법은 내 손으로 사업을 끝내는 거였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투르 드 프랑스:언체인드 레이스'를 보며 위안을 얻었다. 극한의 고통을 마주하는 레이싱 선수들은 말했다. "고통을 더 오래 견디는 사람이 이긴다. 고통받고 싶지 않다면 직업을 바꿔라. "
퍼블리 CEO로 산 지난 10년은 내가 좋아하는 거로 시작해 내가 뭘 원하는지조차 모른 채 나를 잃었다가 다시 나로 돌아오는 과정이었다.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나
지난 2017년 성장 입증 전 받는 프리 A 라운드 펀드 레이징 8개월 동안 벤처 캐피털(VC) 30~40곳으로부터 거절당할 땐 에고가 부서지고 인생이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스타트업이 모인 공간에 있다 보니 투자 성패를 비교하며 시기·질투, 열등감과 분노로 힘들었다.
개인 신용카드 돌려막기까지 하면서 돈의 무게, 펀드 레이징의 혹독함을 배웠다고 믿었다. 아니었다. 거꾸로, 시리즈 B 투자를 받을 즈음 초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유니콘 욕심에다 투자자 등 중요 이해관계자를 행복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의무감만 가득해 엉뚱한 돈 쓰며 에너지를 갉아먹었다. 그렇게 숱한 이들이 경고하고 밟았던 실패의 길, 투자자 기대만큼 성과를 못 얻는 '시리즈 B의 함정'에 빠졌다.
앞서 2019년 하반기 내내 퍼블리 멤버십 구독자 수가 5000명 선에서 정체했을 때 시장 한계라고 판단, '지식'(초기 타깃 독자)을 버리고 '실용'(새 독자)을 택했다. 지적 자극을 주는 콘텐트가 아니라 이메일 쓰기나 회의록 작성 등 주니어 직장인을 위한 실용 노하우 콘텐트로 전환한 거다. 다행히 시장 반응은 좋았다. 2020년 상반기 마의 5000구간을 탈출해 유료 고객 1만명 도달, 일 매출 1억원을 찍었다. 이어 스타트업 투자 시장에 돈이 넘치던 2021년 여름, 시리즈 B 성공으로 100억원 이상 투자받았다.
하지만 VC 투자에 따라오는 '성장 그래프' 압박이 너무 커 천당 아닌 지옥을 오갔다. 결국 내가 좋아하던 퍼블리 멤버십 대신 돈을 벌게 해줄 구인·구직과 네트워킹하는 '한국의 링크드인'인 '커리어리'로 주력 비즈니스를 바꿨다. 주주와의 관계는 험난해지고 콘텐트 가치를 보고 입사한 팀원과 갈등이 커지는 동시에 과도한 채용 탓에 레이오프(해고) 상황에 내몰렸다. 어느 순간 "나는 지금 이 일을 왜 하고 있지?"라는 간단한 질문에도 아무 답을 할 수 없었다.
큰돈만큼 영미권 유명 경영자들 책도 독이 됐다. 한국 맥락에 안 맞는데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오히려 방해가 됐다. 대표적인 게 링크드인 창업자 리드 호프먼의 『블리츠스케일링』이다. 기회의 창은 금세 닫히니 기회를 포착했다면 크게 베팅해야 한다는 실리콘밸리식 성공을 주장하는 책으로, 당시 한국 스타트업계 모두 이 책을 봤다. 넷플릭스 조직문화 등을 담은 '컬처 덱'도 모두 따라 했다. 나 역시 겉멋 들려 덜컥 무제한 휴가 제도를 도입했다가 5~6년 뒤 큰 비용을 들여 되돌려야 했다.
나는 뭘 배웠나
화려한 공작새처럼 깃털을 세우고 있지만 실제로는 몸을 보호할 등껍질 없는 민달팽이 같은 존재가 대표다. 운 좋게 투자자(이재웅 다음 창업자)를 확보한 채 창업한 나는 더 그랬다. 주식, 지분구조, 주주명부, 시장 크기…. 뭘 모르는지조차 모르는 채 시작했고, 행운은 실패로 이어졌다. 오죽하면 첫 IR(투자설명) 때 "어떻게 돈 벌 건가"라는 투자자 관심사는 전혀 모른 채 내 사업 가치 설명에만 열을 올렸다. 발표 후 질의응답은 당연히 엉망이었다.
경영학 전공인데, 실제로는 까막눈이었던 셈이다. 아쉬운 게 한둘이 아니지만 '스타트업은 VC 투자를 받아야 한다'는 통념으로 아무 고민 없이 허겁지겁 자금을 조달한 게 제일 후회스럽다. 어리석게도 투자에 부대조건이 따라오는 걸 몰랐다.
무지로 시작했어도 실패를 막을 기회는 있었다. 투자자 등 주변의 좋은 사람들에게 먼저 물어보고 손 내밀어 도와달라 했다면 퍼블리의 결말은 달랐을 거다. 나를 내려놓고 약한 모습을 보여줘야 상대가 나를 돕는데, 난 무조건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고 누구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중요한 결정을 터놓고 상의하지 못했다. 2023년 6월, 1년 뒤 매각하겠다고 결정한 순간에 더 넓은 조언자 그룹을 만났더라면 아마 다른 선택지가 열렸을 거다.
책임감 강한 K 장녀 기질은 사업의 걸림돌이었다. 어릴 때부터 칭찬에 중독돼온 탓인지 늘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다. 욕먹더라도 거칠게 일을 장악해 결과를 내야 한다는 걸 간과했다. 막판 2~3년에야 좋은 사람 아닌 좋은 대표가 돼야 했었다는 걸 겨우 깨달았다. 결과적으로 좋은 딸도 못 됐다. 엄마가 내 실패 기록을 읽고 너무 속상해하셨으니 말이다.
이와 별개로 독자(소비자)를 중심에 두지 않고 나(공급자)를 우선시한 게 아닌가 반성했다. 마지막 순간, 패션플랫폼 스타일쉐어를 2021년 무신사에 매각한 윤자영 대표가 "내가 팔고 싶다고 파는 게 아니라 매력적인 대상이 되어야만 팔리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돌이켜보면 매각만이 아니라 사업을 영위할 때도 고객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고객을 계몽하려는 잘못된 결정을 참 많이도 했다. 경영의 구루 피터 드러커가 "기업이 돈을 버는 건 고객 요구를 변화시켜서가 아니라 고객을 만족시킨 보상"이라고 그렇게 강조했는데도.
그럼에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경기장 안 사람' 연설을 인용하며 이 말을 남기고 싶다. "모든 명예는 비평가가 아니라 실제로 경기장 안에서 뛰는 사람에게 돌아간다. 설령 실패한다 해도 대담하게 도전하다 실패한 사람은 성공도 패배도 모르는 차갑고 소심한 영혼들과는 결코 같은 위치에 있지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