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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애의 시시각각] 정권서 투서 장려하나

중앙일보

2025.11.18 07:24 2025.11.18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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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애 중앙SUNDAY 편집국장
헌법 불존중 논란의 ‘헌법존중 정부혁신 태스크포스’에 비판을 보태기로 한 건 이재명 대통령의 변호사 출신인 박균택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주해(註解)’ 때문이다. 그는 “내란 동조의 기준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예컨대 윤석열에게 안 좋은 상황이 전개될 때마다 걱정하는 언행으로 부하들의 지탄을 받았던 공직자가 있다. (그런 공직자한테는) 증거가 없으면 징계는 못 하더라도 상당한 소명이 이뤄진 경우라면 인사상 불이익을 줘야 하는 것 아니겠냐”라고 말했다. 각종 투서 전망에 대해선 “민주 정권에선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공직사회서 음해성 투서 많은데
TF선 '내란 극복' 내걸며 양성화
특정 집단만으로 국정운영 되나
윤 전 대통령에게 온정적인 데다 공개 발언까지 했다면 그의 정신세계가 온전한지 우려하는 게 온당하지, 그걸 ‘내란 동조’로 몰 수 있는지 의문이다. 내란을 이렇게 넓히니 ‘정치 공세’란 면박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의 초점은 그러나 ‘투서’다. 우린 투서공화국이다. 어느 정도일까 싶을 텐데 미 군정 시절에도 그랬다. 원로 언론인 오인환의 『이승만의 삶과 국가』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 “(하지 장군은) ‘이승만은 솔직하지 않고 정서적으로 불안하다. 야비하고 부패했으며 예측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감정적으로 격하게 비난했다. 하지만 이승만의 정치생명을 노리는 하급수 같은 것은 쓰지 않았다. 정치자금에 관한 것 등 수많은 이승만 관련 투서에 대해서 조사하지 않고 묵살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11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날 김민석 국무총리가 '헌법 존중 정부혁신 태스크포스(TF)'를 제안하고 이 대통령이 수용하는 형식으로, 정부 차원의 공무원 대상 조사를 공식화했다. 연합뉴스
민주 정권에선 투서가 없을 것이라고? 과거 경험상 기대난망이다. 20여 년 전인 2004년 1월 월스트리트저널(WSJ)에 ‘한국에서의 숙청(South Korean‘s Purge)’이란 글이 실렸다. 동맹파∙자주파 갈등 속에서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윤영관 외교장관을 교체한 걸 두고서다. 외교부 관료가 저녁 자리에서 한 ‘대통령 뒷담화’가 투서로 정권에 전달됐다. WSJ는 해당 관료 실명을 쓰며 이렇게 주장했다. “만약 대통령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쫓겨나는 게 정당화된다면 미 국무부에서도 많은 이들이 쫓겨났을 것이다. 윤 장관의 퇴진에서 진정 걱정되는 건, 좌파 학자조차 (동맹파라며) 노 정부에 자리 잡을 수 없다면 (노 정부와) 워싱턴과의 관계가 나아질 방법을 찾기 더욱 어려울 것이란 점이다.” 문재인 정부 때 실세로 알려진 금융위 고위직이 갑자기 병가를 냈는데 나중에 “청와대 특별감찰반에 각종 음해성 투서가 전달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주장한 일도 있다.

외교 관료를 투서로 궁지로 몰았던 이도 투서로 날아갈 만큼 투서는 많다. 과거 대통령실 민정에서 일했던 한 인사는 “한 자리를 두고 두세 명부터 대여섯 명이 경쟁을 한다. 그나마 시켜 달라는 사람은 낫다. 어떤 사람은 씹고 투서도 한다”고 했다. 인사검증을 담당했던 이는 “투서자의 이름이 있고 은행 정보도 있는데 가짜인 경우도 있다. 막판엔 투서를 안 보게 됐다”고 토로했다.


6시간 계엄에 해봐야 얼마나 많은 이가 동조했겠나. 그럼에도 ‘내란 극복’이란 이름으로 10개월치를 본다고 하고 ‘제보 센터’까지 둔다. 잠재적 대상 공무원만 75만 명이다. 그 말 많고 탈 많은 투서를 양성화하고 독려하는 처사다. 누군가는 “먼저 밀고한 X이 살아남는다”고 했다.

‘헌법존중’이든 ‘적폐청산’이든 공직자들에게 ‘너는 누구 편이냐’를 묻기 시작하면 그들이 속한 제도는 망가진다. 과거 국가정보원이 그랬고 외교부가, 법원∙검찰∙경찰이 그랬다. 공무원증을 달되 충성심은 진영에 있는 야심가들이나, 아예 진영과 얽매일 일을 기피하는 이들만 남아서다. 정치적으로 무리하거나, 복지부동인 자들이다. 야심가들은 선택에 따른 결과를 마주하고 비야심가들은 월급을 또박또박 받을 것이다. 그러나 장삼이사는? 이런 제도에서 숙고를 통한 최선, 아니 차선의 정책이 나올 수 있겠나. 한 현자는 “특정 생각을 강요하는 건 미래를 도둑질하는 것”이라고 했다. 특정 집단만으로 꾸리겠다는 것도 다를 바 없다.



고정애([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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