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이후 동북아시아 정세가 심상찮다. 미·중 갈등은 트럼프 행정부 출범 후 첫 정상회담으로 가까스로 봉합됐지만, 이번에는 중·일 간 갈등이 불거졌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의 대만 유사시 집단자위권 행사 발언으로 촉발된 이번 갈등은 2012년 일본의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 열도 국유화 당시의 대립을 뛰어넘는 양상으로 번지고 있다.
이번 중·일 갈등은 돌발적인 것이 아니다. 미·중 전략 경쟁 구도 속 밀착한 북·중·러에 대응해 한·미·일 협력이 강화된 데 따른 반작용으로 봐야 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한국의 원자력추진잠수함 도입을 전격 승인하고, 평화적 목적의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 및 우라늄 농축 권한 확대에도 동의했다. 이는 동북아 안보 지형의 틀을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중국과 북한의 반발이 예상되는 사안이다. 마침 다카이치 총리의 대만 관련 발언이 중국으로선 ‘울고 싶은데 뺨 맞은’ 격이 됐다. 한국이 중·일 갈등을 불편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북한이 어제 한·미 공동 팩트시트와 한·미안보협의회(SCM) 공동성명을 두고 “(한·미의) 대결적 기도가 다시 한번 공식화·정책화됐다”며 반발한 것도 이런 맥락일 것이다.
정부는 지난 한·중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고위급 전략 소통 채널을 가동해 현재의 동북아 긴장 고조 상황이 악화하지 않도록 관리할 필요가 있다. 상황 관리를 위해선 양국 지도자의 입장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원잠 도입과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은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과 미국의 동맹 부담 강화 방침에 따른 조치며, 중국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설명해야 한다. 또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행사도 지속해서 주문해야 한다.
때마침 남아프리카공화국 G20 정상회의에 참석하는 이재명 대통령은 리창 중국 총리와 다카이치 총리를 만날 기회가 있다. 이를 정상 간 소통 기회로 적극적으로 활용했으면 한다.
지난 정상회담에서 셔틀 외교와 미래지향적 관계에 합의한 한·일 두 정상은 남아공 만남을 통해 현 동북아 상황에 대한 양국 지도자의 인식을 공유해야 한다. 최근 일본이 한국 특수비행팀 ‘블랙이글스’의 급유 지원을 거절한 이후 양국 국방 교류가 중단된 상황도 발전적 한·일 관계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도 확인해야 한다.
정권 초반 협력을 다짐하다가 시간이 갈수록 과거사 문제로 관계가 급전 직하하는 역대 정부 한·일 관계 패턴을 반복해선 안 될 일이다. 이런 때일수록 한·중·일 3국 정부 관계자와 정치인 모두 향후 한·중 및 한·일 관계에 악영향을 줄 수 있는 언행을 삼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