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명실상부한 선진국이다. 선진국 문턱에서 좌절하는 ‘중진국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도약했다. 이 과정엔 여러 결정적 계기(트리거)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1980년대 중후반의 성장이다. 86~88년 3년간 우리 경제는 매년 12% 안팎으로 초고속 성장했다. 더불어 물가 안정과 국제수지 흑자까지 세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시기였다. 당시 저금리·저유가·저달러라는 ‘3저 시대’가 찾아왔다. 저달러는 원화 가치도 낮춰 수출경쟁력을 높였다. 그래서 혹자는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3저 시대를 맞은 것은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였다. 그중에 한국은 독보적이었다. 한국의 성장률은 4% 내외였던 세계 평균의 세 배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80년대 성장 직전은 위태로웠다. 경제와 정치가 모두 혼란스러웠다. 그 전까지 한국은 쑥쑥 자랐다. 63년 1억 달러 남짓이던 수출은 77년 100억 달러를 넘어섰다. 수출 증대에 힘입어 경제는 같은 기간 연평균 10%를 넘는 성장을 이룩했다. 그러나 빠른 성장으로 인한 급속한 수요 증가에다 석유파동이 더해져 70년대는 물가상승률이 무려 20%를 넘는 해가 많았다.
중화학공업 육성책도 70년대 후반에 걸림돌로 작용했다. 73년 중화학공업화 선언 이후 정부는 화학·철강·기계 등 새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대규모 시설투자 등이 성과로 이어지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설상가상으로 설비 투자 등을 위해 외국에서 빌린 돈이 계속 불어나 ‘외채망국론’까지 대두했다.
“인플레이션은 히틀러보다 나쁘다” 경제 전문가와 관료들은 물가를 잡는 안정 시책과 시장 개방 같은 자유화가 중요하다고 주장했지만, 박정희는 수출 증대와 고속 성장에 사로잡혀 이들을 냉대했다. 마침내 박정희 시해와 뒤이은 정치적 혼란 속에서 80년 성장률은 -1.5%로 곤두박질쳤다.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안정을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내세웠다. 80년 초 ‘서울의 봄’은 민주화로 나아가는 움직임이었지만, 군사정변 세력은 이것이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파멸로 몰고 가고 있다고 규정했다. 안정을 위한다며 광주민주화운동을 짓밟았고, 정의사회 구현을 내세우면서 정치인 연금, 언론 통폐합, 교수 해직 등을 통해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억압했다.
정치뿐 아니라 경제도 안정을 최우선 목표로 추구했다. 박정희 정부가 수출 증진을 통한 경제발전에 매진한 것과 비교하면 경제 운용 기조의 엄청난 선회였다.
핵심은 물가 안정이었다. 높은 물가 상승은 임금과 원자재 가격 등을 끌어올리고, 이로 인한 비용 상승이 다시 상품 가격을 높이는 악순환을 초래할 수 있다. 이러면 사재기나 부동산 투기가 기승을 부리고 사회와 경제가 혼란스러워진다. 나아가 높은 물가 상승은 저축 의욕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투자에 필요한 자금 공급을 줄여 경제성장을 어렵게 한다. 바로 60~70년대 국내에서 일어난 일이다.
물가 안정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전두환에게 심어준 대표적 인물은 박봉환 경제과학심의회 사무국장(나중에 동력자원부 장관이 된다)으로 알려졌다. 그는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이었던 시절 경제 과외교사를 하며 “인플레이션은 히틀러보다 나쁘다”고 귀에 못이 박이도록 말했다.
전두환 정부는 물가상승을 억제해 경제와 사회의 안정을 도모하고 성장을 이어가려 했다. 정부부터 지출을 줄여 물가상승 압력을 낮추고자 했다. 공무원 임금을 동결하고 대규모 건설사업 등을 줄였다. 82~86년 정부 재정지출은 연평균 9.4% 증가했다. 같은 기간 물가상승률과 경제성장률이 각각 연평균 3.6%, 10.3%임을 고려하면 사실상 재정 규모를 축소한 셈이었다. 84년엔 예산을 아예 동결했다. 여당인 민정당은 이듬해 총선을 의식해 반대했다. 그러자 전두환은 “그런 선거는 져도 좋다”며 동결을 밀어붙였다(이장규,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여기에 더해 제로베이스 예산제도를 추진했다. 기존 항목의 예산을 조금씩 조정하는 게 아니라 원점에서 재검토해 불필요한 지출을 없애는 방식이다. 이는 단기적으로 물가상승 압력을 낮췄으며, 장기적으로는 만성적인 재정적자를 줄이고 정부 예산을 합리화하는 데 기여했다. 통화량 증가율도 획기적으로 낮췄다. 61~79년 연평균 33.6%였던 것을 81~86년 6.4%로 떨어뜨렸다.
권위주의적 방법도 동원했다. 행정지도나 세무조사를 활용한 가격 인상 억제가 일상적으로 이뤄졌다. 83년에는 쌀 추곡수매가를 동결했다. 공무원은 물론이고 일반 기업의 임금 인상도 통제했다. 대표적으로 인기 없는 정책들이었다. 농민과 근로자, 공무원들은 물론 민정당까지 불만을 표출했지만 전두환은 반발을 억눌렀다.
흥미로운 점은 정부가 물가 안정을 위해 강경책만 쓴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규제 개선과 철폐를 통해 자연스럽게 물가, 나아가 경제를 안정시키고자 했다. 공정거래위원회 설립과 시장 개방이 대표적이다. 70년대까지 국내에서는 생산자가 담합을 통해 독점 이익을 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또 국내 산업을 보호·육성한다는 명목으로 수입을 막고 정부가 해당 기업에 독점적 지위를 부여하곤 했다. 이는 제품 가격 상승을 통해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무역 흑자로 해외여행 자유화 기반 마련 정부는 81년 공정거래법을 제정하고 공정위를 설립함으로써 경쟁을 촉진하고 물가 안정과 소비자 후생 증진을 도모했다. 아울러 상품시장과 자본시장을 개방·자유화하는 로드맵을 발표하고 추진했다.
경제 안정과 자유화 정책이 추진된 기간에 우리는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70년대에 20%를 넘나들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5% 수준으로 떨어졌다. 물가 안정을 위한 여러 조치는 소비와 투자 위축을 불러 경제가 움츠러들게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81~88년 우리 경제는 연평균 10.4%라는 경이로운 성장을 이룩했다. 80년대 초중엽에 일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세계 평균을 넘어서 중진국 반열에 올랐다. 80년대 중엽에는 처음으로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했다. 비록 몇 년 지나지 않아 적자로 바뀌었지만, 2000년대 접어든 뒤 지속하고 있는 무역수지 흑자는 이때 기반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무역수지 흑자를 통한 외환 확보는 해외여행 자유화를 가능케 함으로써 국민의 안목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86년 경제의식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중 81%가 ‘중산층’이라고 답했다. 당시 국민 대다수가 경제를 안정적이고 낙관적으로 바라봤다는 뜻이다. 중산층 확대에 따른 시민의식의 성장은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로 이어졌고, 마침내 87년 권위주의 정권을 무릎 꿇렸다. 80년대의 경제 성과가 민주화까지 일궈낸 것이다.
물가·성장·국제수지 세 마리 토끼를 잡은 데다가 민주화까지. 그저 운 좋게 3저 시대를 만났기에 이뤄낸 성과가 아니었다. 80년대 후반의 고성장은 정책적 뒷받침의 결과이기도 했다. 85년 국제통화기금(IMF) 등에서 곧 저금리·저유가 시대가 오리란 보고서가 나왔다. 물가 안정에 자신감을 얻은 정부는 이제 긴축의 고삐를 어느 정도 풀어도 문제 없으리라 보고, 세계 경기 회복에 대비해 기업들이 미리 설비투자를 할 수 있도록 은행 대출 규제를 완화하는 등의 정책을 펼쳤다. 이것이 맞아떨어졌고, 저달러까지 겹치면서 한국 경제는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는 시기를 맞이했다.
정책 성공의 근간에는 경제 전문가를 기용하고, 그들이 일관된 기조를 꾸려갈 수 있도록 한 정치적 뒷받침이 있었다. 김재익 경제수석은 경제학 박사며, 사공일 경제수석과 김만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은 한국개발연구원(KDI) 출신이다. 이들은 안정과 자유화라는 소신을 꾸준히 밀어붙였고, 전두환은 전폭적으로 밀어줬다. 예산 동결처럼 정치권이 아우성치며 반대할 때는 보호막을 쳤다. 경제적 자유주의자들과 정치적 권위주의자가 안정이라는 슬로건하에 연합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