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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수의 평양, 평양사람들] 핵 보유 인정? 제재 해제? 트럼프 구애 거절한 김정은의 속내는…

중앙일보

2025.11.19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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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수 통일문화연구소장·논설위원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달 25일부터 29일까지 5일 간 공개 활동을 멈췄다. 지난달은 북한이 노동당 창건 80주년(10월 10일)을 맞아 각종 행사로 분주하던 시기다.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열병식엔 중국의 리창 총리와 드미트리 메드베테프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 등이 참석했다. 베트남 최고지도자인 또럼 공산당 서기장과 통룬 시술릿 라오스 국가주석도 평양을 찾았다. 김 위원장은 이들과 회담하고, 협력 관계를 확대하기로 약속했다.

트럼프의 아시아 순방 기간
공개 활동 중단한 김정은
북·미 회동 수용 고심 흔적
시진핑 방한 의식해 미룬 듯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기 집권 때인 2019년 6월 30일 판문점 군사분계선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다. [중앙포토]
김 위원장은 당 창건 80주년을 계기로 외연 확대에 나섰고, 동시에 무기 전시회인 ‘국방발전-2025’, 평양종합병원 준공식 등 지난달에만 27회의 공개 행보를 이어갔다. 이런 분주함 속에서도 5일 동안 외부 활동을 중단한 건 고민의 시간이 필요했던 게 아니냐는 추정이 가능하다. 김 위원장은 과거에도 한국이나 미국과의 정상회담 등 결단을 앞두고 두문불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막판까지 회동 고심한 김정은
눈길을 끄는 건 지난달 말 김 위원장의 공개 활동 중단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 일정과 겹쳐 있다는 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달 24일(현지시간) 워싱턴을 떠나며 “김정은과 만나고 싶다. 그도 우리가 그곳에 간다는 걸 알고 있다”고 밝힌 직후부터 중단했다가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을 떠난 뒤에야 공개 활동을 재개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말레이시아, 일본, 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을 방문하며 북한을 핵국가(nuclear power)라고 하거나 자신에겐 대북 제재 카드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 위원장이 9월 21일 최고인민회의에서 “(미국이 북한의) 비핵화를 포기하면 마주 서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한 연설이나, 2019년 2월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 때 대북제재 해제를 간절히 원했던 점을 의식한 언급일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방한 일정(10월 29~30일)의 연장을 시사하며 러브콜을 보냈지만 결국 불발됐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북·미 정상회담을 언급했던 트럼프 대통령은 2019년 6월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한 문장에 김 위원장이 판문점으로 달려왔던 기억이 떠올랐을지 모른다. 당시 트럼프는 일본을 떠나기 전 자신의 트위터에 “내가 내일 판문점에 간다. 시간이 된다면 보자”고 썼다. 김 위원장은 한달음에 달려왔고, 약식 정상회담이 열렸다. 판문점 회동이 즉흥적이었던 것 같았지만 트럼프는 이미 수일 전 미 국무부 고위인사에게 회담 가능성을 타진했다고 한다. 국무부에서 촉박한 시간과 북한과 접촉할 마땅한 채널이 없다는 이유로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보고했다. 이에 트럼프는 중앙정보국(CIA) 채널을 동원했다. CIA는 판문점에 유엔사와 북한 군부 간 핫라인(일명 핑크폰)이 있으니 이를 활용하면 북한과 접촉할 수 있다고 했다. CIA의 분석은 적중했고, 북한은 “문재인 대통령이 참가하지 않는다면 만날 수 있다”는 조건을 제시하며 접촉에 응했다.

이번에도 트럼프 대통령의 러브콜을 앞두고 핑크폰 채널 등 북한과 접촉이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국가정보원은 지난 4일 국회 정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북한이 트럼프와의 정상 회동을 막판까지 고심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북·미 관계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는 최선희 북한 외무상의 러시아와 벨라루스 출장(지난달 26~28일) 조정을 검토했고, 북한은 정상 회동이 열릴 경우 트럼프 대통령을 배석할 미국 측 실무진의 성향 분석을 한 정황이 있었다고 한다. 최선희 외무상이 전용기를 이용해 러시아에 갔다는 점도 김 위원장이 결심만 하면 곧장 복귀할 수 있는 상황이었음을 시사한다.

김정은에게 트럼프는 ‘잡은’ 토끼?
만약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 기간에 김 위원장과 회동이 성사됐다면 전 세계 언론의 조명이 여기에 집중됐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의 CNN 방송을 비롯해 주요 외신들은 회동 장소로 거론됐던 판문점 인근 임진각에서 생방송 준비를 했다는 얘기도 있다. 2023년말 이후 남북관계를 ‘적대적 2국가론’으로 규정한 북한 입장에선 북·미 정상회동이 경주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의 의미를 절하시키고, 김 위원장이 주연이 될 수 있는 기회라 여겼을 수 있다. 이미 트럼프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북한의 핵을 간접 인정하고, 대북제재 해제를 시사하는 언급까지 했으니 김 위원장의 숙원을 풀 수 있다는 계산도 가능하다. 북한 내부적으로 세계 최강대국 지도자인 트럼프가 북한에 구애하고, 김 위원장이 받아줬다는 식의 선전을 할 수도 있었다. 여기에 트럼프를 애태우는 과정만으로도 김 위원장이 하노이의 굴욕을 만회할 기회였다. 북한으로서는 북·미 정상회동이 열리는 것만으로도 ‘남는 장사’였던 셈이다.

그런데도 김 위원장이 이런 남는 장사에 나서지 않은 배경은 뭘까.

우선 북한은 당장의 이익 못지않게 대중 관계를 고려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북한은 현재 러시아를 든든한 뒷배로 삼고 국제정치 및 경제적으로 급한 불을 끄고 있다. 하지만 북한에 있어 중국의 후원과 지원은 절대적이다. 그런데 시 주석이 APEC에 참석해 미국과 세기적 담판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김 위원장이 조명을 받는다면 중국 입장에선 달가울 것이 없다. 아무리 자주와 주체를 내세우는 북한이라도 중국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여기에 트럼프 대통령이 이미 공개적으로 북한을 뉴클리어 파워라고 했고, 대북제재 해제 카드를 꺼내든 만큼 굳이 김 위원장이 협상장에 나설 필요성도 줄어들었다. 노벨 평화상이나 임기가 정해져 있는 트럼프의 입장을 고려하면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에 오기 전 언급했던 구애 과정에서 이미 북한은 얻을 만큼 얻은 것이다. 북한 입장에선 트럼프 대통령과 회동을 다음 기회로 미룰 경우 몸값을 더 높일 수 있다는, 즉 핵보유국이나 대북제재 해제를 기정사실로 한 뒤 협상에 나설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렸을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을 떠나면서 “나는 다시 오겠다. 김정은과 관련해서는 다시 오겠다”며 김 위원장과 회동에 끝까지 미련을 보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바빴다는 이유를 댔지만 결과적으로 체면을 구기고 말았다. 어쩌면 북한은 이 결과를 핵과 미사일 카드 덕이라 여기며 “우리의 총창 우(위)에 평화가 있다”는 자신들의 노랫말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그러나 2028년 미국의 대선이 진행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트럼프 대통령과 대화할 수 있는 김 위원장의 시간은 앞으로 2년 남짓에 불과하다.





정용수([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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