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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벽이 움직인다…학생 37% 늘린 '우주선 학교'의 기적

중앙일보

2025.11.20 12:00 2025.11.20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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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경남 사천 용남고에서 학생들이 최연진 교장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 학교는 학생들이 쉬는 시간에도 소통할 수 있도록 동선을 모으는 한편 학교 한가운데로 자연스럽게 시선이 모이도록 설계됐다. 송봉근 기자

지난 4일 오전 경상남도 사천시 용현면의 용남고 교문에서 바라본 이 학교 건물은 마치 우주선 같았다. 은색 빛 외벽의 건물이 기둥 위에 떠 있는 모양새다. 이 건물엔 3D프린터 제작실, 300석 규모 강당·공연장이 갖춰져 있다. 운동장 건너편엔 서로 다른 크기의 레고 블록을 쌓은 듯한 건물도 보였다. 교실들이 있는 학교 본관으로, SF영화 속 미래 도시를 보는 듯했다. 남해 앞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테라스에선 삼삼오오 모인 학생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학교 건물은 저녁 시간 주민들이 공연하고 빵도 굽는 공동체 공간으로 활용된다.

1967년 개교한 용남고는 한때 ‘문제아가 다니는 학교’로 불렸던 곳이다. 추가 모집에도 정원을 채우지 못한 해도 있었다. 이젠 교육계의 주목을 받는 학교로 변신했다. 인구 감소 지역에 있지만 학생이 찾아오는 학교로 탈바꿈해서다. 용남고 재학생은 2021년 325명에서 올해 468명으로 37.2% 늘었다. 2021년 ‘인구 11만명’ 선이 무너진 사천시 상황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다. 요즘은 해외에서도 입학 문의가 온다. 강당에서 반 대항 배구 경기를 보며 응원하던 2학년 김신혜 양은 올해 초 아프리카 가나의 국제학교에서 전학왔다. 김양은 “해외 근무를 마친 아버지와 함께 귀국했는데 인터넷으로 사진·영상을 보고 용남고를 택했다”고 했다.

학교의 변신을 주도한 이는 학교법인(용남학원) 설립자의 손자인 최연진(52) 교장이다. 미생물학 박사인 그는 2009년부터 할아버지가 세운 중·고교에서 과학 교사로 근무했다. 그는 획일적인 공간에 같은 내용만 가르치는 주입식 교육으론 학교의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다. 최 교장은 “ 학생이 한 층에 한쪽만 바로보는 여느 학교와 달리, 새 학교는 설계 단계부터 어디서나 서로를 보면서 소통할 수 있도록 구상했다”고 설명했다.

지난 4일 경남 사천 용남고 전경. 오래된 학교 건물 가운데 새로 지은 개방형 학교가 보인다. 드론으로 촬영했다. 교실 옆에 테라스가 있어서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토론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송봉근 기자

그의 꿈은 2019년 용남고가 교육부 ‘그린스마트 미래학교' 사업에 선정되면서 구체화됐다. 학교법인·교육부·경남도가 함께 마련한 176억원을 들여 2023년 7월 새 건물이 완공됐다. 모든 교실의 크기를 각각 달리하면서도, 학생이 학교 중심에 모여 소통하게 설계했다. 교실 벽은 접이식으로 설치한 곳이 많았다. 수업 특성·규모에 맞춰 교실을 합치거나 분리하기 위해서다.

새로 단장한 학교엔 새로운 수업이 채워졌다. 학생이 원하는 대학 전공과 연계된 맞춤형 수업, 자유로운 토론 수업, 프로젝트 수업을 대폭 늘렸다. 경상대 등 인근 대학의 교수·강사를 초빙해 강의를 맡겼고,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의 전투기 제작 현장 등을 방문하는 프로그램 등도 확대했다. 최 교장은 "인구 감소 지역의 학교 중엔 정부 지원을 받고도 되살아나지 못한 사례도 적지 않다. 공간만 바뀐다고 학교가 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수업이 바뀌니 학생 만족도가 높아졌다. 학생들은 과목 간 융합 수업을 용남고의 특징으로 꼽았다. 2학년 하연수 양은 “화학, 인공지능(AI) 수업을 각각 딴 교실에서 하다가도 프로젝트 수업을 할 땐 벽을 허물어 교실을 합친다”고 전했다. 이날 교실 창문엔 ‘기후 변화 시대, 해양 생물은 어떻게 생존할 수 있을까’란 학생 발표물이 붙어 있었는데, 생물학·화학 융합수업의 결과물이었다.

박경민 기자


학교 측은 올해에 이어 내년에도 졸업생의 약 30%가 서울 소재 상위권 대학 등에 진학할 것으로 기대한다. 올해 수시전형에서 KAIST의 바이오 및 뇌공학과에 합격한 3학년 박재현 군은 “전자공학에 관심 있어 회로를 공부하다가 학교에 스마트팜 과제가 있어 친구들과 함께했다”며 “이런 활동을 자기소개서 등에 밝힌 게 도움된 것 같다”고 했다.

용남고는 지난달 한국교육개발원(KEDI)의 ‘지방 소멸 시대, 지역 실정에 맞는 다양한 학교 조성 방안’ 포럼에서 모범 사례로 소개됐다. 권순형 KEDI 선임연구위원은 “공간만 우수하다고 학생이 유입되는 건 아니다. 교과과정을 융합해 학생을 이끌 교사 양성도 진행된다면 용남고와 같은 사례가 전국에 확산될 것”이라고 말했다.
 내부에서 본 용남고 전경. 건물들이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여 플로팅 스쿨(Floating school)이라고 불린다. 송봉근 기자




김민상.이보람([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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