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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미제 '신정동 연쇄살인'...끝내 '저승'에서 그놈 잡았다

중앙일보

2025.11.20 20:55 2025.11.20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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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6월 1차 범행 당시 피의자 장모씨가 포대와 노끈으로 결박해 초등학교 인근에 유기한 피해자의 시신.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단 형사기동대

경찰이 서울 양천구 신정동 부녀자 연쇄살인 미제 사건의 범인을 20년 만에 밝혀냈다. 그러나 범행 당시 60대였던 장모씨가 2015년 7월 암으로 사망한 것으로 나타나 사건은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될 예정이다.

서울경찰청 형사기동대 중요미제·장기실종사건팀은 2005년 신정동에서 두 차례 발생한 살인 사건 피의자 장모씨를 광범위한 조사와 과학수사를 통해 특정했다고 21일 밝혔다.

사건은 2005년 6월6일로 거슬러간다. 이날 신정동의 한 초등학교 노상 주차장에서 쌀 포대에 담긴 20대 여성의 시신이 발견됐다. 5개월 뒤 2025년 11월 20일 신정동 주택가에서 비닐과 돗자리에 싸인 40대 여성의 시신이 발견됐다. 두 여성 모두 목이 졸려 숨졌고, 머리엔 검은색 비닐봉지가 씌워져 있었다. 시신 부검 결과, 두 피해자의 시신에서 성폭행 정황도 발견됐다.

연쇄살인 사건이라고 판단한 양천경찰서는 38명 규모 전담수사팀을 구성해 현장 탐문, 전과자 대조 등 대대적 수사를 펼쳤다. 수배 전단 총 9000매를 배포하고 신정동 일대를 샅샅이 뒤지면서 8년간 수사를 이어갔지만 결정적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결국 사건은 2013년 미제로 분류됐다.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단 형사기동대 신재문 팀장이 21일 서울 마포구 서울경찰청 마포청사에서 양천구 신정동 부녀자 연쇄살인 사건 범인 특정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미궁에 빠진 사건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계기는 2015년 SBS 다큐멘터리 ‘그것이 알고싶다’ 방송이었다. 제작진은 2006년 5월 신정동 반지하 주택에서 발생한 납치미수 사건의 범인과 1·2차 범인이 동일인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생존자가 탈출 전 몸을 숨겼던 곳에 있던 신발장 측면에 엽기토끼 스티커가 붙어있는 걸 봤다는 증언 등이 근거였다. 이후 이른바 ‘신정동 엽기토끼 사건’이란 별칭이 붙어 장기미제 사건의 대표 격으로 회자됐다.

그러나 수사 결과, 장씨가 저지른 범행은 엽기토끼 사건과는 무관한 것으로 확인됐다. 엽기토끼 사건이 발생한 5월에 장씨는 이미 강간치상 혐의로 수감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경찰은 “장소와 시기가 비슷하긴 했지만 두 사건이 연결된 정황은 없다”고 밝혔다.



성폭행 포함, 강력범죄로 교도소 수감

경찰에 따르면, 당시 신정동의 한 빌딩 관리인으로 근무한 장씨는 2006년 2월 빌딩 내 병원을 방문한 여성에게 “1층 문이 잠겨 있으니 지하로 안내하겠다”며 접근한 뒤 강간을 시도했다. 하지만 기지를 발휘해 가까스로 탈출한 피해자의 신고로 덜미를 붙잡힌 장씨는 2009년까지 교도소에 수감됐다.

당시 장씨는 성폭행을 비롯한 강력범죄 전과가 3회 이상 있었지만, 신정동 연쇄살인 사건의 용의 선상에 오르지 않았다. 장씨가 근무한 빌딩을 경찰이 탐문한 적이 있지만, 그를 조사한 기록은 없다고 한다. 이에 대해 장씨의 주거지가 신정동이 아니어서 용의자 범위가 방대했던 점, 범행과 시신 유기 장소가 거리가 있던 점, 발생 당시 DNA가 확보되지 않은 점 등이 범인 특정에 혼선을 줬다고 경찰은 설명했다.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단 형사기동대 신재문 팀장이 21일 서울 마포구 서울경찰청 마포청사에서 양천구 신정동 부녀자 연쇄살인 사건 범인 특정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번 범인 특정은 수사관들의 집념과 발전된 과학수사가 합작해 이뤄낸 성과였다. 2016년 재조사에 착수한 서울경찰청 미제사건 전담팀은 2016년과 2020년 두 차례에 걸쳐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증거물 재감정을 의뢰했다. 과거와 달리 유전자 분석기법이 발전하면서 1·2차 사건 증거물에서 DNA가 발견됐고, 동일범 소행이라는 사실을 확정할 수 있었다.

수사팀은 두 사건 모두 피해자 시신에서 모래가 발견된 점에 착안해 2005년 서남권 공사현장 관계자, 신정동 전·출입자 등 약 23만 명을 수사대상자로 선정했다. 이후 전국을 돌면서 대상자 중 우선순위 용의자 명단에 오른 1514명의 유전자를 채취하고 대조했지만 DNA는 일치하지 않았다.

수사팀은 사망자까지 범위를 넓혔다. 사망한 용의자 56명 중 장씨를 특정했지만 그는 이미 화장돼 유골을 확보할 수 없었다. 장씨가 생전에 작성한 서류 등도 사본이거나 변질돼 DNA를 확보할 수 없었다.



범인이 진료차 방문한 병원서 검체 찾아내

'진실을 밝히는 과학의 힘'이란 원훈을 갖고 있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원주 본원. 이영근 기자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수사팀은 장씨가 생전 살았던 경기 부천·광명·시흥 일대 병원 40여 곳을 탐문했다. 이 중에서 장씨의 세포조직 검체를 보관한 곳을 찾아냈다. 진료차 병원을 방문한 장씨의 검체는 보관기관이 지났지만 기적적으로 폐기되지 않았다고 한다.

수사팀은 지난 5월 국과수에 DNA 감정을 긴급 의뢰했다. 2달 뒤 장씨의 검체 DNA와 1·2차 사건 증거물 DNA가 일치한다는 국과수 회신이 왔다. 20년 미제 사건의 범인이 확인된 순간이었다. 5년간 사건을 추적한 김장수 중요미제·장기실종사건수사 팀장은 “회신을 받기까지 잠 못 이루는 밤의 연속이었다. 결과를 확인하자마자 눈물이 흘렀다”고 말했다.

이후 수사팀은 장씨 가족, 동료 재소자 등에 대한 보강수사를 진행했다. 장씨가 근무한 빌딩 지하를 국과수와 합동감식한 결과, 피해자 시체에서 검출된 곰팡이·모래 성분과 환경적 유사성이 확인됐고 범행에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노끈도 발견됐다. 경찰은 연쇄살인 사건도 이 빌딩 지하에서 이뤄졌을 것으로 추정 중이다. 한 재소자에 따르면, 장씨는 생전 범인이 아니면 알 수 없는 내용을 언급하거나 피해자의 외모를 묘사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신재문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단 형사기동대4팀장은 “살인범은 저승까지 추적한다는 각오로 수사를 이어왔다”며 “오랜 기간 경찰을 믿고 기다려주신 유가족께 깊은 애도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이영근([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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