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책은 전쟁의 희생물? 때론 무기이자 전쟁의 수혜자였다[BOOK]

중앙일보

2025.11.20 21:00

  • 글자크기
  • 인쇄
  • 공유
글자 크기 조절
기사 공유
전쟁과 책
앤드루 페테그리 지음
배동근 옮김
아르떼



역사는 보존과 말살의 투쟁이다. 누구는 보존하려 기를 쓰고 누구는 말살하려 눈을 부라린다. 양자의 입장은 흔히 뒤바뀐다.

보존을 위한 대표적 도구가 책이라면 말살을 위한 최고 수단은 전쟁이다. 전쟁이 책을 말살한 최초의 사례는 기원전 23세기까지 올라간다. 수메르의 아카드 제국이 시리아의 에블라 왕국을 정복하고 도서관의 점토판 1만5000개를 파괴했다. 인류 최초의 제국이 인류 최초의 도서관에서 인류 최초의 책을 파괴한 것이다. 이처럼 인류의 집단 지식과 정신문화가 한순간에 삭제되는 비극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베를린 국립도서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국립도서관, 모술 도서관 파괴로 이어지며 21세기에도 그치지 않고 있다.


이쯤 되면 책이 전쟁의 희생물이라는 사실에 의문의 여지가 없을진대, 영국 세인트루이스대학의 역사학 교수인 저자는 이러한 통념을 뒤집는다. 책의 원제이기도 한 ‘전쟁에서 책(book at war)’은 전쟁의 명분이 되는 이념의 확산과 선전, 전쟁을 수행하는 전략과 기술, 병사들의 사기 진작, 대중 동원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책이 전쟁의 공모자이자 수혜자이기도 하다는 커밍아웃인 셈인데, 이는 현대로 올수록 더하다. “19, 20세기에 발발한 대규모 전쟁들이 독서 열기가 가장 높았던 나라들 사이에서 벌어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당대 가장 많은 문학적 유산을 자랑했던 프랑스와 최대의 출판 강국이었던 영국, 독일이 1차 대전에 뒤엉켜 싸웠다.


2차 대전은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지도자들끼리의 격돌”이었다. 처칠은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했고 히틀러의 『나의 투쟁』은 독일에서만 900만부가 팔렸다. 애서가로 유명한 스탈린도 “재능보다 지나치게 많은 책”을 써 수백만 부나 배포했고, 드골 또한 출판 1년 만에 독일어와 러시아어로 번역된 『상비군을 향해』의 저자로 처음 이름을 알렸다. 이들 모두 도서관 사서 경력의 마오쩌둥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데, 그의 『마오쩌둥 어록』은 50여개 언어로 10억부가 발행됐다.


저자는 전쟁과 책의 공모 관계를 전전과 전중, 전후 등 시기는 물론 전쟁 지휘부, 전방의 병사와 후방의 시민 등 각기 다른 책의 수요에 따라 재단해 입체적으로 풀어낸다. 이를 위해 책의 범위를 전시 팸플릿, 전단과 포스터, 과학 논문과 기밀 문서, 사적 일기 등 문자 문화 전반으로 확대한다.

먼저 책은 전쟁의 명분을 만든다. 19세기의 베스트셀러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쓴 해리엇 비처 스토를 만난 자리에서 링컨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처럼 작은 여성이 이런 위대한 전쟁을 일으켰다는 건가요?” 스토가 해부한 노예제도의 잔악상이 “50년 논쟁으로도 결론내지 못했던 노예 노동의 도덕성 여부를 단칼에 드러낸 것”이다.


책은 전쟁을 수행하는 핵심 동력이 되기도 한다. 미국이 원자폭탄 개발에 독일의 과학 논문 덕을 본 것은 유명한 얘기다. 1940년 처칠이 노르웨이 해안을 점령한 독일군에 선제공격을 계획할 때 최고의 참고자료는 베데커판 스칸디나비아 관광안내서였다. 2차대전 때 전 세계 미군에게 보급된 진중문고는 1322종 1억 2200만 부에 달했다. 이는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하는 데 도움이 됐지만 출판업계에도 커다란 혜택이 아닐 수 없었다.

전쟁에 맞춤된 ‘전쟁 작가’들의 탄생도 필연이었다. 기자 출신 잰 스트러더가 가장 놀라운 경우인데, 가상의 평범한 여성의 전시 일상을 그린 『미니버 부인』은 30만부가 팔렸고, 영화로도 만들어져 아카데미상 6개 부문을 석권했다. 괴벨스마저 이렇게 칭찬했다고 한다. “독일에 분노하는 언어는 한마디도 없는데 반독일적 경향을 완벽하게 그려냈다.”


저자는 책이 평화의 무기로 재탄생한 순간도 빠뜨리지 않는다. 9·11 테러로 설립된 쿠바 관타나모 수용소에도 더디긴 했지만 도서관 장서가 1만 8000권으로 늘었다. 그곳에 10년 동안 구금돼있던 소년병 출신 오마르 카드르는 도서관 대출 기록으로 유리한 판결을 받을 수 있었다. 시대를 암울하게 만드는 용도로 쓰이기도 했지만 책이야말로 인류가 그때마다 다시 손에 쥔 유일한 희망이었다는 것이 이 인문학 역작의 결론이다.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