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경찰서 강력6팀 형사들은 일대 아수라장이 된 인파를 비집고 안으로 들어서려고 했다. 5분 전 전파받은 무전에 따르면 칼부림 사건 현장은 호남선 건물 앞 화단. 하지만 무슨 일인지 보려는 사람들과 눈앞의 참상에서 뒷걸음질치려는 사람끼리 서로 밀치고 뒤엉켜 형사들의 진입을 막고 있다.
신분을 밝히며 지나가겠다고 해도 웅성거림과 비명에 파묻혀 소용이 없다. 간신히 현장에 다가섰을 땐 화단과 바닥에 핏자국만 흥건했다. 애초 보고받은 피해자 둘은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된 거냐는 천현길 팀장의 물음에 지구대 경관은 현장에서 발견했다며 날 길이 10㎝의 접이식 칼을 전달, 피해자 둘은 구급대가 와서 강남성모병원으로 이송했다고 말했다.
“현장 통제부터 해!”
인파를 밀어내고 곧 노란색 테이프가 쳐졌다. 그리고 목격자를 추려내는 일이 빠르게 진행됐다. 자진해서 열심히 말하는 자도 있었고 겁에 질려 우물거리는 자도 있었다. 하지만 진술은 거의 상통했다.
인상착의는? 30대 초중반의 남성이다. 더벅머리였는데 가발 같다. 어떻게 행동했나? 호남선 정문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이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눈이 희번덕하더니 칼을 꺼내 화단의 남녀를 찔렀다. 인정사정도 없었다.
피해자들은? 연인처럼 보였고 정문을 등지고 서 있었다. 불시에 뒤에서 습격당해 저항조차 못했다. 남자가 먼저 찔렸고, 여자는 그다음이었다. 범인은 여자를 찌를 때 더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엇갈린 건 도주로뿐이었다, 광장 앞 8차로 도로를 무단횡단했다는 진술이 대다수였으나 일부는 범인이 고속터미널역 입구로 달려갔다고 했다.
그 사이 천현길 팀장은 차를 몰아 강남성모병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정체가 극심한 강남 중심지인 탓에 경광등을 울리며 질주, 곧 응급실 앞에다 차를 세우고 뛰어들었다. 그가 피해자의 병상을 가린 흰 커튼을 걷어젖힐 때까지 의료진들은 이러면 안 된다며 만류했으나 병원의 사정을 고려하기엔 너무도 급했다.
왼쪽 병상에 누운 여성은 미간을 찌푸린 채 딸꾹질을 하고 있다. 폐와 심장이 찔려 호흡이 점차 꺼져 가는 신호, 즉 종말성 호흡이다.
반면에 오른쪽 병상의 남성은 쉰 목소리를 쥐어짜내며 살려달라고 애원 중이다. 발작하듯 상체를 들썩이는 남성에게 다가가 누가 범인이냐고 묻자, 그런 말은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하다. “정신 차리고 대답해, 범인 봤을 거 아냐. 누구냐고!” 천현길 팀장이 거듭 재촉하자 남성은 고개를 휙 돌렸다.
“저 여자 남편, 황주, 황주연…! 그 새끼가 갑자기 칼로….”
경찰서로 복귀한 강력6팀은 즉시 황주연에 대한 인적사항을 조사했다. 1975년 2월 전북 남원 출생으로 전과는 없다. 특기할 점이라면 숨진 피해자 김영희(32·가명)와 1997년 결혼했다가 2003년 이혼, 그해 재결합했으나 2006년 갈라선 기록이다.
형사들은 황주연의 실시간 위치를 파악하려 했으나 곧 무위로 돌아갔다. 범행 시간대 전후로 그의 핸드폰이 꺼져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웬만하면 PC방에 숨어들었을 법도 하나, 본인 명의의 이메일이나 사이트 접속 기록도 뜨지 않았다.
이튿날 오전, 황주연 검거를 위해 서초경찰서 강력팀으로 구성된 수사본부가 설치됐다. 전북 남원에 살았다는 황주연의 거주지에 형사들이 급파, 혹시라도 그를 은닉해 줄 가능성을 고려해 지역 탐문수사가 시작됐다. 그런가 하면 부산에도 포진된 황주연의 지인 수색도 동시에 벌어졌다. 그가 심야에 남부권으로 내려갈 만한 여유는 충분했기 때문이다.
오전 11시쯤, 황주연의 매형에게서 제보가 들어왔다. 불과 10여 분 전 황주연이 전화를 걸어 와, 자신이 고속버스터미널에 세워둔 트럭과 거기 태운 딸아이를 챙겨달라고 했다는 거였다.
“그 뭐라더라…, 형사님요, 걔가 그러던데요. 자기가 사고를 좀 크게 쳤다고 숨을 끊으러 간다고.”
수화기를 쥔 천현길 팀장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곧바로 매형이란 자의 통신 내역을 기지국에 넘겨 황주연의 위치를 파악하는 한편, 그가 유기한 트럭 수색을 지시했다.
트럭은 고속버스터미널 인근 뒷골목에 세워져 있었다. 딸아이는 없었다. 아이는 부친이 돌아오지 않자 서울에 사는 이모에게 전화해 그리로 간 것으로 사후 확인됐다.
“황주연은 전처에게 상당히 집착했다. 두 번째 이혼 후 연락이 끊긴 전처를 찾아내려고 이메일에 남은 아이피를 토대로 흥신소에 추적을 의뢰하거나, 119에는 집 나간 아내가 자살할 거 같다며 위치를 알려달라고 했다. 하지만 모두 실패하자 끝내는 딸을 넘겨줄 테니 직접 만나자는 유인책을 시도했다.”(천현길 서초경찰서 강력6팀장)
그렇기에 실제 범행에 쓴 발리송 나이프는 그저 위협용일 수 있었다. 전처가 순순히 따라오지 않는 상황을 가정해 들고 나갔으나 약속 장소에 전처의 애인이 함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래서 목격자의 말대로 눈이 뒤집혔던 것이다.
한편 황주연이 매형에게 전화할 당시 그는 신도림역 개찰구 안의 공중전화 부스에 있었다. CCTV 확인 결과 그는 개구멍 넘듯이 개찰구 안으로 기어들어갔는데, 이 또한 묘한 인상을 남겼다. 표를 산다면 역무원에게 인상을 남길 테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교통카드 태그조차 하지 않은 점은 석연치 않다. 경찰이 카드 내역까지 단시간에 감시할 거라 예상한 듯한 행동이다.
이후에도 그가 경찰 수사를 간파하고 있다는 인상은 계속됐다. 이날 오전 11시30분쯤 매형에게 다시 전화해 “부탁한 건 다 챙겼느냐”고 했을 때 그는 강남역 번화가의 공중전화를 이용했다. 뒤늦게 형사들이 매형을 데리고 강남역으로 가서 황주연과 인상착의가 유사한 남성을 수색할 무렵, 황주연은 사당역을 경유해 삼각지역에서 하차, 다시 지하철을 타고 범계역으로 간 뒤였다.
이날 오후 2시40분쯤, 그가 역 앞 백화점 주변을 서성이던 게 마지막 CCTV 기록이다. 그 후로 그는 완전히 사라졌다.
황주연의 지인 진술도 있었다. “그 새끼 결국 사고 쳤네요. 안 그래도 술 마시다가 그러더라고요. 범죄자들이 경찰한테 왜 잡히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자기는 절대 경찰에 안 잡힐 자신이 있다고.”
범행 당일 피의자를 특정했건만 새 단서도, 증거도, 아무것도 없이 시간만 흐르면서 형사들의 질문도 기존의 레퍼토리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러자 소문이 돌았다. 경찰의 단서가 바닥났다고.
수사가 안 풀리면 형사들은 티끌만 한 단서라도 붙잡고 백방으로 뛰어다닌다. 그래도 아무것도 안 나오면 전화를 기다린다. 결국 서초경찰서는 황주연에 대한 현상수배 전단을 전국에 배포했다. 언론 보도도 앞다퉈 이뤄졌다.
180㎝의 건장한 체격에 비뚤어진 안면, 오른쪽 만두귀. 얼핏 스쳐봐도 잊히지 않을 얼굴이다. 형사들은 거기에 기대를 걸었다.
제보는 쏟아졌다. 공사장 인부와 닮았다, 내가 아는 택시기사인 것 같다, 금산군의 인삼 농장에서 봤다 등등. 하지만 막상 가보면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창원에서 한 여성이 울먹이며 전화를 걸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