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그러니까 2025년 11월 19일. 나는 2시간의 항해를 마치고 모항(경남 진해 잠수함사령부)으로 돌아왔다. 잠수함 승조원이 부두에 홋줄을 걸자 경남 진해 잠수함사령부가 시끄러워졌다. 정박 중인 동료(다른 잠수함)들이 낸 기적(汽笛) 소리였다.
이날은 나의 마지막 항해였다. 동료들이 이를 축하하고자 기적을 울렸다,
내 이름은 ‘장보고’.
나는 전설이다.
대한민국 해군의 첫 잠수함인 내 군번(함번)은 SS-061. 장보고는 통일신라 시대 해상 무역을 개척한 영웅이다. 대한민국 해군은 바다를 장악한 장보고의 이름을 빌려 잠수함의 작전 능력을 상징하고, 국가 안보와 해양력 강화의 의지를 표현하려고 작명했다.
대한민국 해군의 잠수함 사업은 내 이름을 땄다. 그래서 나는 ‘장보고 가문’의 시조이기도 하다. 나를 시작으로 모두 22척의 해군 잠수함이 지어졌다. 가장 막내인 장영실함은 지난달 22일 진수됐다.
(※다음 내용은 안병구 예비역 해군 준장과의 인터뷰, 정성 예비역 해군 대령의 『한국해군의 잠수함, 호위함, 초계함 탄생비화』를 바탕으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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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올림픽 때문에 4년 늦어진 사업
나는 1988년 8월 3일 서독(지금의 독일) 킬의 HDW(지금의 tkMS) 조선소에서 잉태(건조착수)됐다. 잠수함 곳곳에 ‘Made in West Germany(서독에서 제조)’라는 마크가 붙어있다. 내가 잉태되기까지 많은 사연이 있다.
1970년대 북한은 옛 소련의 로미오급 잠수함을 잇따라 직도입하거나 면허생산했다. 대한민국 해군에게 비상이 걸렸다. 북한 잠수함을 상대하려면 대한민국 해군도 잠수함이 필요했다.
처음엔 미국의 마지막 재래식 잠수함인 탱급(1500t) 잠수함을 사 오려고 했다. 그런데 탱급 잠수함은 1951년 지은 구식이라 MRO(정비·수리·창정비) 비용이 엄청났다. 해군이 포기한 이유였다. 대신 대한민국 해군은 미국 해군으로부터 대잠수함 연합 작전을 벌이면서 대잠수함전 능력을 키워야만 했다.
대한민국 해군은 1980년대부터 코스모스급 잠수정(70t)과 돌고래급 잠수정(150t)을 보유했다. 그런데 이들 잠수정은 유사시 북한에 특수부대를 보내는 용도였기 때문에 북한 잠수함을 사냥하기엔 벅찼다.
대한민국 해군은 잠수함을 무척 갖고 싶어했다. 그러나 나처럼 괜찮은 잠수함은 비싼 몸이라 당시 대한민국의 경제력으론 엄두를 못 냈다. 1970년대 후반 대우중공업(지금의 한화오션)이 잠수함 사업을 논의하려고 독일 HDW를 찾아갔으나 문전박대를 받았다. 대한민국과 같이 ‘못 사는 나라’에서 잠수함 건조가 힘들 것이란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북한의 잠수함 증강을 지켜볼 수만 없었던 대한민국은 1983년 잠수함 사업을 시작했다. 서독이 209급(1200t)을, 프랑스가 아고스타급(1700t)을, 이탈리아가 사우로급(1600t)을 각각 제안했다. 3파전이 치열했다. 당시 몇 안 되는 서울의 특급호텔엔 세 나라 조선소 관계자들로 북적였다. 당시 프랑스의 아고스타급이 유리했다고 한다.
그러나 잠수함 사업은 6개월 만에 전면중지됐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열기로 한 대한민국이 국제 스포츠 행사를 준비하려고 국방비를 크게 늘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87년 1월에서야 잠수함 사업이 다시 시작했다. 잠수함 사업 특수사업단이 꾸려졌다. 특수사업단의 사무실은 국방부와 해군본부가 아니라 서울역 앞 대우빌딩(지금의 서울스퀘어) 17층에 자리 잡았다. 사복을 입었고, 호칭도 이사(준장)·부장(대령)·차장(중령)·과장(소령)으로 불렀다.
보안 때문이었다. 잠수함 사업은 이미 서독의 209급으로 기울었고,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들러리였다. 가격을 낮추고, 계약조건을 유리하게 하려고 세 나라의 경쟁을 붙여야 했다, 그래서 보안이 강조됐다.
1987년 12월 1일 특수사업단은 잠수함 사업을 대통령에게 보고해 재가를 받았다. 그리고 서독 HDW와 계약을 맺었다. 서독 209급 3척을 들여오되 1척은 서독에서 만들고 나머지 2척은 서독으로부터 설계도와 부품을 들여와 한국에서 짓는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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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명 ‘초승달’에 숨겨진 웅대한 꿈
209급은 대한민국을 포함해 13개국에 56척이 팔린 베스트셀러다. HDW는 잠수함 설계 기술은 가르쳐줄 순 없지만, 잠수함 건조 기술은 현장직무실습(OJT)으로 알려주겠다고 13개국과 계약했다. 이 중 대한민국만이 유일하게 독자 잠수함 건조 기술을 확보했고, 독자 잠수함 설계기술까지 갖췄다.
비결은 내 태명은 ‘초승달’에 있다. 지금은 기울어진 초승달이지만, 언젠가 꽉 찬 보름달이 되겠다는 대한민국의 염원이 담긴 태명이었다. 사정은 이렇다.
1988년 4월 25일 대한민국 해군 특수사업단 13명이 서독 킬로 떠났다. 잠수함 1, 2, 3번 함 승조원과 정비요원 86명과 건조 현장에서 OJT로 잠수함 건조 기술을 배울 대우중공업 기술자 180여명이 뒤를 이었다. 대우중공업의 180여명은 선체·배관·전기·용접의 베테랑들이었다.
킬은 당시 209급을 계약한 6개국(한국 포함) 관계자로 북적였다. 해군 인수팀은 다른 나라 해군 인수팀과 국제 축구대회를 열기도 했다.
HDW가 약속한 OJT는 건조 현장을 지켜보는 수준이었다. 자료를 나눠주거나 따로 교육하지도 않았다. 잠수함은 수상함보다 더 복잡하고 정밀했다. 지켜보기만 해선 도저히 잠수함 건조 기술을 배울 수 없었다.
그래서 해군과 대우중공업은 머리를 썼다. 모든 기술자는 수첩과 볼펜을 받았다. 매일 건조 현장에서 보고 들은 걸 수첩에 꼼꼼하게 적었다. 퇴근 후 대우중공업 기술자들은 수첩 내용을 취합해 일일보고서를 만들었다. 대우중공업 본사에선 일일보고서를 읽은 뒤 궁금하거나 부족한 내용을 보완하라고 연락했다.
“국민의 혈세를 낭비할 수 없다”며 대우중공업 기술자들은 피곤한데도 열의를 다해 일일보고서를 만들었다. 조선소 안에서 사진을 찍을 수 없었는데도, 언제부터인가 일일보고서에 건조 현장의 사진이 첨부됐다. 대우중공업 기술자들과 맥주를 마시면서 친해진 HDW 기술자들이 눈감아준 것이었다.
일일보고서는 산더미처럼 쌓였고, 이는 나중에 대한민국 잠수함 발전의 소중한 자양분이 됐다.
이걸론 부족했다. 나를 운용하려면 잠수함 전용 교육·훈련·작전·전술이 필요했다. 잠수함에 대한 모든 게 대한민국 해군에게 새로운 영역이었다. 배워야할 께 천지였다. 그러나 이들 자료는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공동 자산이라 외국에게 내줄 없다는 게 서독 해군의 입장이었다. 대신 서독 해군은 대한민국 해군의 질문엔 성실히 답했다. 그리곤 대한민국 해군이 필기하지 못하도록 감시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해군은 서독 해군에게 들은 답변을 외운 뒤 사무실로 돌아가 타자기로 자료를 만들었다. 킬에서는 잠이 없는 대한민국 해군을 ‘해군 사무실 전기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해군’으로 불렀다. 이들 자료의 제목은 ‘초승달’이었다. 내 태명이다. 자료는 외교행낭을 통해 해군 작전사령부로 보내졌다. 이를 바탕으로 대한민국 해군 교리·교재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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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배에 실려 체면을 구긴 귀국
내 생일은 1991년 9월 12일이다. 이날 내가 킬에서 진수됐다.
내 아버지(안병구 함장·장보고함 인수팀장이자 초대 함장)는 나와 당시 킬에서 건조 중인 서독 해군 잠수함의 차이점을 발견했다. 서독 해군 잠수함의 이산화탄소 제거기가 내 것과 달랐다. 내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때부터 쓰던 구식 가성칼륨 방식이었다. 서독 해군은 신형 소다라임 방식이었다.
잠수함은 좁은 공간에서 수십 명이 몰려 있는 수중 전투함이다.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아지면 승조원이 두통이나 어지럼증을 느끼고, 심한 경우 의식을 잃는다. 그래서 함내 이산화탄소를 포집하는 이산화탄소 제거기가 필수다. 기준은 100시간 잠항해도 선내 이산화탄소 농도가 1%를 넘지 않는 것이다.
HDW 측은 가성칼륨 방식과 소다라임 방식이 큰 차이가 없다고 해명했다. 아버지는 물러서지 않았다. 내가 대한민국 잠수함의 시작인 만큼 어떠한 결함도 있어선 안 된다는 심정이었다고 한다.
결국 아버지는 건조 후 지상에서 막판 작업 중인 내 몸(선체)에 승조원과 HDW 관계자를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해치(승강구)를 잠근 뒤 100시간을 그 안에서 지냈다. 그랬더니 이산화탄소 농도는 1%를 넘었다. 이 같은 시험을 두 번이나 했다. HDW는 손을 들고 이산화탄소 제거기를 서독 해군 것으로 바꿨다.
그리고 대한민국 해군은 1992년 10월 14일 나를 인수했다. 그해 8월 1일 아버지를 중심으로 나를 운용할 부대가 이미 창설됐다.
1993년 4월 16일 나는 네덜란드 화물선에 실려 킬을 떠나 5월 20일 대한민국 진해에 도착했다. 체면을 구기게 자력항해를 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 항해기간을 줄이려면 수에즈 운하를 거쳐야만 했다. 그러나 항로 곳곳엔 걸프 전쟁 당시 이라크가 기뢰를 깔아놨고, 당시 소해(기뢰 제거) 작업이 한창 중이었다. 대한민국으로선 내가 금쪽같은데 귀국 도중 조그만 흠이라도 나길 원치 않았다.
나는 1993년 6월 1일 취역했고, 1994년 5월 31일 전력화를 마쳤다. 취역은 해군이 인수한 함정을 함대세력표에 올리고 취역기를 다는 과정이다. 사람으로 치면 호적에 올리는 게 취역이다. 취역한 함정은 실제 작전 임무에 투입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과정을 거치는 데, 이게 전력화다. 전력화하는 데 보통 1년 걸린다.
1994년 6월 1일 나는 대한민국 해양주권을 지키는 임무에 투입됐다. 그리고 30년간 나는 쉼 없이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국민을 보호했다.
서산대사(휴정)의 선시(禪詩)다. 뜻은 이렇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모름지기 그 발걸음을 어지러이 하지 마라. 오늘 나의 발자국이 마침내 뒷사람의 길이 되리니.’ 백범(白凡) 김구 선생이 자주 읊은 글귀란다.
나는 대한민국 잠수함 역사를 썼다. 나도 서산대사의 선시를 가슴에 새겼다. ‘장보고 가문’의 길라잡이로 후회 없는 ‘선생(船生)’을 살았다.
나는 1997년 하와이 파견훈련을 통해 1만 마일(1만 8000㎞) 단독항해에 성공했다. 이렇게 장거리 잠항과 원해 작전능력을 세계에 입증했다.
내 전성기는 2004년 7월 환태평양훈련(RIMPAC·림팩)이었다. 2년에 한 번씩 짝수 연도에 열리는 림팩은 전 세계 다국적 연합훈련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 당시 나는 40번 이상의 가상 어뢰를 발사해 30척이 넘는 함정에 명중시켰다. 내 어뢰를 맞은 함정 중에는 미 해군의 핵추진 항공모함 존 C. 스테니스도 있었다. 상대편 잠수함 2척 만이 내 어뢰공격을 피했다.
내가 태평양을 휘젓는 동안 상대편은 단 1초도 나를 탐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퍼펙트(Perfect) 장보고’.
2013년 한·미 연합대잠전 훈련(Silent Shark), 2016년 서태평양 잠수함 탈출·구조훈련(PAC-REACH)에도 뛰었다. 대한민국 잠수함이 참가하는 주요 해외훈련에 모두 나간 첫 잠수함이 나다.
나는 ‘100번 잠항하면 100번 부상한다’는 잠수함사령부의 안전신조를 실천했다. 동·서·남해와 해외를 종횡무진 누비며 2011년 누적 20만 마일, 2019년 안전항해 30만 마일을 넘어 지난 19일까지 34년간 지구 둘레 15바퀴가 넘는 34만 2000마일을 안전항해했다.
나도 나이가 들면서 요즘 움직이는 게 힘들다. 2024년 1월 2일 대한민국 해군 909교육훈련전대로 부대를 옮겼다. 승조원 교육훈련, 수리함정 팀워크 훈련, 승조원 자격 유지 훈련을 지원하는 게 나의 새로운 임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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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장보고’를 기대하며
지난 19일 마지막 항해 때 대한민국 해군은 아버지를 초청했다. 아버지는 마지막 함장인 이제권 소령과 함께 마지막 항해에 나섰다. 두 사람은 마지막 항해에 사용한 태극기(항해기)에 서명했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 장보고함 도입 이전 수중은 우리 해군의 영역이 아니었습니다. 미지의 세계였던 대한민국 바닷속을 개척한 ‘해양의 개척자’ 장보고함의 처음과 마지막을 함께 하게 되어 감회가 새롭습니다. 90년대 초 독일에서 잠수함을 도입하고 운용기술을 배웠던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 수준의 디젤 잠수함 운용국으로 눈부시게 발전한 모습에 가슴이 벅차고 자부심을 느낍니다. "
나도 왠지 모르게 울컥했다. 강철로 만든 몸(선체)이라 흘릴 눈물이 없지만도 말이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대한민국은 독자 기술로 3000t급 잠수함을 건조했고, 수중발사탄도미사일(SLBM)도 발사했다. 그리고 최고의 재래식 잠수함 기술로 전 세계 시장을 노리고 있다.
나는 다음 달 30일 퇴역한다. 퇴역식에서 군악대의 국가 연주에 맞춰 취역기·국기·해군기가 일제히 내려진다. 전역한 군함은 예비역 함정과 퇴역 함정으로 나뉜다. 예비역 함정은 훈련함으로 쓰이다가 전쟁이 발발하면 다시 취역한다. 나 같은 퇴역 함정은 우방국에 넘겨지거나 지방자치단체의 함상공원 전시물로 사격·미사일 발사 훈련 때 표적함으로 쓰인다.
나는 폴란드나 필리핀이 대한민국 잠수함을 산다면 두 나라 중 한 곳으로 갈 것 같다. 거기서 승조원 교육훈련 임무를 맡을 가능성이 크다.
대한민국은 재래식 잠수함을 넘어서 핵추진 잠수함(핵잠)을 만드려고 한다. 첫 핵잠의 이름은 내 이름을 이어 ‘장보고’로 했으면 좋겠다. 미 해군은 ‘엔터프라이즈(Enterprise)’라는 함명을 8번이나 돌려썼다. 곧 진수할 신형 핵추진 항모는 9대 엔터프라이즈함이다. 자랑스러운 역사를 이어나가려는 의미에서다.
"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 "
나 장보고 또한 그러하리라.
어쩌면 나는 먼 외국으로 갈 수 있다. 그러나 내와 대한민국 해군 잠수함 승조원이 피와 땀으로 일군 전통이 그대로 전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