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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포에서 상하이로, 마침내 귀향 [왕겅우 회고록 (22)]

중앙일보

2025.11.22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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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던 귀향 / Preparing to Go Home

부모님이 점령기 동안 중국 귀환을 언급하지 않으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나도 시내의 다양한 중국인 가정에 친숙해지면서 그 생각을 떠올리지 않고 지냈다. 학교와 그린타운 친구들로부터 차단되면서 이포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그에 대한 소속감을 느끼게 되었다. 열한 살에서 열네 살까지 자라나는 시간을 통해 나 자신을 ”이포의 중국인“이라 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게 되었다.

가족 간에 방언을 쓰고 불교나 도교 민속신앙을 따르는 사람들과는 아직 거리가 있어도, 내 상상력이 받아들인 영국 소설의 세계를 떠올려보면 내가 무엇이 아닌지는 알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식으로 시내에서 사귀게 된 새 친구들과 편안하게 어울릴 수 있었고 아버지의 공부방에 함께 하는 친구들과 특별히 가까워졌다.

전쟁이 끝나는 순간 우리 가족이 특이한 부류에 속한다는 사실을 다시 느끼게 되었다. 그린타운에 살던 시절보다 덜 특이하게 느껴진 것은 중국에 가겠다는 다른 중국인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개 친척 방문 정도였고 영구 귀국을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여비가 마련되는 대로 떠나야겠다는 부모님 말씀에 나는 아무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늘 바라보던 길이었고 그 길을 바꿀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착한 아들답게 나는 이포와의 작별을 위해 마음을 가다듬었고 그 관점에서 그곳 생활을 되돌아보았다. 일종의 상실감과 새로운 생활을 바라보는 흥분이 엇갈렸다. 우리의 중국 귀환은 확실한 일로 느껴졌고, 이 계획을 학교의 모두에게 알리기로 마음먹었다.

우리 중에는 점령기 동안 변화를 겪은 사람이 많았고 우리의 경험에는 많은 재조정이 필요했다. 내가 겪은 제일 뚜렷한 변화는 1941년의 본과 5학년 급우들과 멀어진 것이다. 1945년 10월에 본과 8학년에 들어간 학생은 나 외에 몇 명 안 되었고 1946년 1월 졸업시험을 치른 학생 중 제일 어린 세 명 중 하나였다. 그래서 같은 반 33명 급우 중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대개 전쟁 전에 상급반에 있던 학생들로 나보다 여러 살 더 많은 사람도 있었고, 다행히 학급의 ”애기“인 내게 모두들 친절했다.

내 최대 약점은 물리-화학이었다. 과학 담당 제가다손 선생님은 마드라스대학 출신의 인도인으로 성실한 분이었는데 우리 학교에 실험시설이 없어서 1주일에 한 번 기초적 실험을 위해 구시가의 성 미카엘 학원에 가야 했다. 수학 담당 웅켁초우 선생님은 뛰어난 교사였지만 나는 미적분 이해를 위해 따로 도움을 얻어야 했다.

내가 버틸 수 있는 유일한 과목은 영문학이었다. 뎀시 선생님은 좋은 분이고 셰익스피어의 〈멋대로 하세요〉 낭송과 연기를 즐겼지만 케임브리지 졸업시험의 다른 참고문헌인 조지프 콘래드의 〈나시서스 호의 깜둥이〉나 알렉산더 킹레이크의 〈이든〉에는 관심이 적었다. 두 책 모두 내가 좋아한 것은 지도책을 들여다보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아끼던 지도책을 전쟁 중에 잃어버려서 새로 샀다. 책에 나오는 신기한 장소들을 지도에서 찾아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영국 작가들이 제국의 영향력을 온 세계에 퍼뜨리던 관리와 사업가들 못지않게 범세계적 존재였음을 알게 되었다.

[역주: 〈Nigger of the Narcissus〉는 콘래드의 1897년 소설. 봄베이에서 런던으로 향하는 상선에서 일어난 일을 그렸다. 〈Eothen〉은 여행작가이자 역사학자인 킹레이크(1809-1891)가 1844년 발표한 오리엔트(시리아-팔레스타인-이집트) 여행기다.]

그런데도 지리와 역사 같은 과목에는 흥미가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궁금한 것은 각 장소가 무엇으로 가장 유명한가 하는 것뿐이었다. 특히 지도에 붉은색으로 표시된 장소(대영제국의 판도) 중에서. 역사에 관해서는 아버지와 함께 읽은 글에서 본 중국사의 극적 사건들이 대영제국 건설의 역사보다 재미있고 의미도 깊다는 생각을 하던 생각이 난다.

졸업까지의 15개월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내가 얼마나 학교가 그리웠는지 모르고 지냈었다. 모든 활동에 참여하고 싶었다. 호국단에 가입해 목총을 지급받고 학교 주변을 행진했다. 배드민턴에서는 학교 선수단에 거의 뽑힐 뻔했으나 다른 종목에서는 그만한 성적을 내지 못했다. 크로스컨트리 경주를 열심히 해서 결승전에서 자랑스러운 2등으로 들어왔다. 변론반에 가입해서 타이핑의 에드워드7세 학교 팀에게 이기기도 했다. 매주 몇 편씩 영화를 보는 틈틈이 시내 노동자들의 쟁의 원인을 알아보기도 했다. 그 위에 중국어 시험 준비도 했다. 난징에 간 뒤에나 치르게 될 시험이었다. 그러나 졸업시험 준비에는 충분한 시간을 쓸 수 없어서 간신히 낮은 1급이라도 딴 것이 다행이었다. 대학 진학을 위한 최소 자격이었다.

그 와중에 아버지가 시키신 일 하나는 아주 감동적이면서 슬프기도 한 일이었다. 그분이 수십 년간 지으신 시 대부분이 전쟁 중 여러 차례 이사하는 동안 없어졌다. 남은 것을 모아 인쇄하기로 결정하셨다. 등사기를 쓰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어서 내게 스텐실지에 베껴 쓰게 하셨다. 내 해서(楷書) 글씨체를 인정하신 것이다. 나는 이 인정이 매우 자랑스러워서 시작 전에 몇 시간 연습했다. 결국 조심스러운 작업으로 아버지 시를 모두 써냈다.

아버지는 그 결과에 만족해서 시내의 최신 등사기로 인쇄해 왔다. 친구들에게 돌렸는데, 몇 부나 찍어 몇 부나 돌렸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묶음에 ”척재신여고(惕齋燼餘稿)“란 소박한 제목을 붙이고 보존을 위해 아들에게 필사를 맡겼다고 서문에 적으셨다. 그분이 돌아가시자 어머니가 그 내용을 추모집에 넣으셨고. 30년 후 내가 재쇄를 찍었다. 그분을 그만큼 가까이 한 일, 그분의 내면에 가장 깊이 접근했던 그 일은 내 마음에 깊은 감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분 시의 감성과 품격을 내가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분이 그토록 좋아하시던 고전 시문을 내가 따라 쓰지 못하게 된 것은 슬픈 일이다.

페락 주정부는 대부분 공무원의 밀린 임금을 지불할 방침을 세웠고, 1946년 초에 아버지가 받은 돈으로 중국행 여비가 충분했다. 그러나 내 중국 대학 진학을 위해서는 중등과정을 마쳐야 했다. 이 자격 없이 중국에 가면 그곳 학교를 다니고 졸업장을 따야 했다. 아버지는 내가 케임브리지 졸업시험을 치른 다음 그 자격증으로 난징 당국의 중학 졸업 인정을 받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해서 귀국 계획을 늦췄다. 1947년 3월에 1급 판정이 나왔다. 아버지는 바로 선표를 예약해서 6월에 우리는 상하이로 가는 우편선 ”카르타고“호에 탔다.

이포를 떠나 미지의 곳으로 향하던 내 마음을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순응의 마음과 불확실성이 뒤섞여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70세 되셨을 때 그 기억을 적으신 것이 있다. 내게 해주신 말씀이지만 언젠가 내 자식들에게도 전해줄 것을 기대하신 말씀일 것이다. 내 이야기의 이 단계를 상하이행 항해에 관한 어머니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겠다.

순탄한 항해로 겨우 닷새 만에 상하이에 도착했다. 네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이 우리를 마중하러 부두에 나왔다. 헤어진 동안 겪은 일들이 너무 많아서 다시 만났을 때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랐다. 행복한 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네 종조모님이 아들 결혼식에 참석하러 상하이에 와 조프르 가의 넉넉한 집에 머물고 계셔서 우리도 거기서 지냈다. 네 아버지는 사촌동생의 결혼식이 너무 사치스럽다고 생각해서 참석하고 싶지 않아 하셨다. 난징에 꼭 봐야 할 급한 일이 있다고 핑계를 대고 너를 데려가셨다...


남양에 오래 살다가 온 나는 옷도 수수하고 낡아 멋진 것이 없고 보석도 전혀 없었다. 결혼식에서 내 모습은 시골뜨기 같았을 것이다. 그래도 나로서는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끝에 몇 글자로 드러내신 감정은 어머니가 어떤 분이셨는지, 내게 한결같았던 그분 모습을 보여준다. 귀환이 그분에게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는지 이 한 문장이 말해 준다.


[Wang Gungwoo, 〈Home is Not Here〉(2018)에서 김기협 뽑아 옮김]



김기협([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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