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키득거리다 어느새 눈물바다”...10주년 맞은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중앙일보

2025.11.23 00:01 2025.11.23 00:02

  • 글자크기
  • 인쇄
  • 공유
글자 크기 조절
기사 공유
“보면 알아. 저절로 집중하다가 울게 돼 있어.”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장면. '조씨고아'의 어머니인 공주가 '조씨고아'를 '정영'에게 맡아 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사진 국립극단

지난 21일 오후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의 올 시즌 첫 공연이 열린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한 여성 관객은 공연 시작 전 함께 온 옆자리 친구가 “150분(인터미션 포함) 이면 너무 긴데?”라고 묻자 “길지 않아”라며 이렇게 말했다.

국립극단의 대표 레퍼토리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뮤지컬에서나 볼 수 있는 ‘회전문 관객(같은 작품을 반복해 관람하는 관객)’을 보유하며 10년째 이어온 흔치 않은 연극이다.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장면. '정영'은 '조씨고아'를 살리기 위해 부인 몰래 자신의 늦둥이를 희생시키려 한다. 사진 국립극단

스타 연출가 고선웅이 중국 고전인 기군상의 『원보원조조씨고아』를 각색해 2015년 첫 무대에 올렸다. 그해 대한민국연극상, 동아연극상과 같은 주요 상을 휩쓸었다. 초연 이듬해인 2016년엔 원작자의 나라 중국에 초청돼 베이징 국가화극원 대극장 1800석 객석을 가득 채웠다. 지난 6번의 국내 시즌 동안 관객 점유율 93%를 기록했고, 누적 관객은 3만6171명에 이른다. 지난 21일 7번째 시즌이자 10주년 기념공연 첫 무대의 막이 올랐다. 순수 연극으론 보기 드문 일이다.

그간 서울 공연은 550석 규모의 명동예술극장에서 이뤄졌다. 올해는 객석 1200석 대극장으로 무대를 옮겼다. 10주년 공연 역시 연출한 고선웅은 “그간 큰 극장에서 공연했을 때 이 작품 서사의 중량감과 미장센(무대 위 배치)이 오히려 낫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큰 무대에서도 복잡한 장치 없는 특유의 절제된 무대를 유지하되,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의상 등의 교체가 있었다고 극단 측은 설명했다.

진나라 대장군 ‘도안고’가 당대 명재상이자 정치적 라이벌인 ‘조순’에 대한 질투심을 드러내며 극이 시작한다. 질투가 쌓이자 광기 어린 적개심이 자랐고 도안고는 음모를 꾸며 조순의 구족(九族) 300명을 몰살한다. 대개의 복수극이 그렇듯 조씨 가문의 마지막 핏줄 ‘조씨고아’는 목숨을 부지한다. 조순에게 은혜를 입은 떠돌이 의원 ‘정영’이 조씨고아를 지켜내면서다.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장면. '정영'(왼쪽)은 전직 관련 공손저구를 짜고 대장군 도안고(가운데)를 속여 '조씨고아'를 살려낸다. 사진 국립극단

조씨고아를 살리려 많은 이들이 죽어간다. 정영이 목숨 걸고 남의 아이를 지켜내는 동안 자신의 가족은 그 대가를 치른다. 정영의 아내는 비극성을 극대화한다. 어렵게 얻은 늦둥이를 조씨 가문의 복수에 희생시켜야 한다는 정영에 대해 아내는 “그깟 약속, 그깟 의리가 뭐라고”라며 절규한다. 원작엔 없는 내용이다. 정영의 부인이 아이의 시신을 묻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 객석의 탄식과 울음소리는 최고조에 이른다.

정영은 결국 복수에 성공한다. 복수를 당한 도안고는 정영에게 묻는다. “자네 정말 대단한 사람이구먼…네 인생은 도대체 뭐였어?”

복수극의 미덕인 카타르시스는 없고 먹먹함만 남는다. 이 작품은 동아시아 옛 고전 특유의 ‘권선징악’ 결말로 인한 후련함을 버렸다. 그 자리는 대의와 복수의 허무함으로 채웠다. 고선웅은 “이 연극은 ‘복수가 성공하면 반드시 후련해질까’라는 질문을 던진다”고 밝혔다. 오수경 한양대 중어중문학과 명예교수는 “권선징악, 유교적 의리 및 충성과 같은 고전적 복수 서사가 아닌 생명 존중, 인간 존엄이라는 보편 가치에 중점을 둔 것이 동시대 관객을 설득했다”고 짚었다.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장면. 신이 멸문지화를 당한 조씨 집안의 마지막 생존자인 것을 알게 된 조씨고아(왼쪽). 친부인 줄 알았던 의원 '정영'에게 “ 못 믿겠다 ” 라고 하자 정영은 제 팔을 자른다. 사진 국립극단

이보다 더 비극적일 수 없는 이야기인데, 객석에선 이따금 폭소가 터진다. 과장된 몸짓과 연기, 허를 찌르며 웃음 짓게 하는 고선웅 특유의 대사가 관객을 웃긴다. 오수경 교수는 “서구 비극과는 다른, 우리만의 해학과 풍자가 버무려진 비극”이라고 설명했다.

초연부터 함께한 배우들의 호흡도 일품이다. 정영역의 하성광을 비롯해 장두이(도안고), 이형훈(조씨고아) 등 초연부터 빠짐없이 이 작품에 참가한 배우들이 10주년 작품의 무대도 올랐다. 원로배우 이호재가 당시 왕인 ‘영공’역을 맡아 새로 합류했다.

“이런 우환을 만들지도 당하지도 마시고…그저 좋게만 사시다 가시기를”이라며 관객을 배웅하는 이 작품은 오는 30일까지 이어진다.



하남현([email protected])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