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서울 강동구 천호동을 순찰하던 경찰관은 휴대전화를 쳐다보면서 두리번거리는 60대 남성 A씨를 보게 됐다. 순간 이상함을 느낀 경찰관이 A씨에게 도움이 필요한지 묻자 A씨는 “두 달 전부터 채팅 애플리케이션(앱)에서 외국에 사는 여성을 알게 돼 사귀는 사이가 됐다”며 “입국 비용 2000만원 송금 문제로 말다툼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로맨스스캠’(연애 빙자 사기)에 휘말린 것으로 의심한 경찰은 A씨가 돈을 보내지 않도록 즉각 조치했다.
서울경찰청은 로맨스스캠 범행에 휘말릴 뻔한 A씨 피해를 예방했다고 23일 밝혔다. 당시 경찰이 A씨 채팅 내용을 확인해보니 로맨스스캠 일당은 20대로 보이는 듯한 여성의 사진을 올리며 A씨에게 ‘여보’라고 부르는 등 연인처럼 대화했다. 피해자와 유대감을 형성하는 전형적인 로맨스스캠 수법이다.
인공지능(AI) 기술이 진화하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사용이 일반화하면서 A씨 사례와 같은 로맨스스캠 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지난달 경찰청이 송석준 국민의힘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로맨스스캠 피해를 집계한 지난해 2월부터 지난 7월까지 피해액은 총 1380억원대, 사건 접수는 2428건에 달했다. 지난해 2~7월과 올해 같은 기간을 비교하면 피해액은 30.2%, 피해 접수 건수는 34.7%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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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팅에서 특별한 즐거움 있을 것” 채팅 유혹
캄보디아 등에 거점을 두고 로맨스스캠을 벌인 대규모 조직이 지난달 무더기로 송환돼 재판에 넘겨졌지만 로맨스스캠 범죄는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는 B씨(32)는 최근 SNS에서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친구가 되자”며 “채팅에서 특별한 즐거움과 비밀이 있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B씨는 “사진과 말투가 뭔가 어색해 로맨스스캠인 것을 알고 차단했다”며 “채팅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속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딥페이크(AI 기술을 이용해 만든 가짜 영상) 사진을 보내거나 가상자산 기술을 활용하는 등 범행 수법도 진화하는 중이다.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 니콜라스 코트 금융·반부패범죄국 국장은 최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로맨스스캠으로 시작해서 자연스럽게 큰 액수의 암호화폐 투자를 유도하는 형태의 범행이 새로운 트렌드(유행)가 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전문가들은 보이스피싱보다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은 로맨스스캠에 대한 경각심을 더욱 높여야 한다고 지적한다. 박미랑 한남대 경찰학과 교수는 “경찰과 정부 당국이 계속 로맨스스캠 수법을 알리며 경고하지만 많은 사람이 여전히 이를 사기라고 인식하기보단 ‘개인적 실연’ 등으로 생각해 신고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며 “보이스피싱보다 로맨스스캠에 대한 정보는 상대적으로 아직 부족한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특히 SNS를 통한 사기에 상대적으로 취약한 고령자를 대상으로 주의할 것을 교육·홍보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했다. 로맨스스캠 관련 사건을 다수 수사한 경찰 관계자는 “SNS를 통해 금전이나 투자 등을 요구한다면 무조건 사기 범죄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반드시 의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