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을 위해 제안한 평화구상안이 탄력을 받을 수 있을지 주목을 받고 있다. 유럽연합(EU) 등 서방세계의 지지 여부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측근이 연루된 부패 스캔들 여파가 관건으로 꼽힌다.
미국과 우크라이나 정부 고위 관계자들은 오는 23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에서 만나 평화구상안 관련 협상을 이어간다. 22일 미 정치전문 매체 악시오스 보도에 따르면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 스티브 위트코프 백악관 중동특사, 댄 드리스컬 육군 장관 등이 미 대표단으로 협상에 참여한다. 드리스컬 장관은 20일 우크라이나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을 만나 평화구상안 초안을 전달했다.
협상엔 미국과 우크라이나 당국자뿐만 아니라 독일, 프랑스, 영국 등도 참여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평화구상안 수용 시한을 이달 27일로 설정한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측 입장을 듣기 위한 자리로 해석된다. 러시아는 미국과 수차례 만나 평화구상안 초안 작성 과정에 관여했다.
총 28개 조항으로 구성된 평화구상안은 우크라이나보다는 러시아에 유리한 것으로 평가된다. 미국이 우크라이나의 안전 보장을 제공한다는 내용이 포함됐지만,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 전체를 러시아가 가져가고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차단한다는 등 전쟁 전후로 러시아가 줄곧 주장해온 내용이 담겼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군 규모를 60만명 규모로 제한한다는 내용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사국인 우크라이나뿐만 아니라 미 정치권에서도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에 대한 지나친 보상안”이란 반발이 나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평화구상안에 대해 “최종안은 아니다”라며 조정 가능성을 열어뒀다. 그러나 방점은 전쟁 종식에 찍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는 어떻게든 이 전쟁을 끝내야 한다”며 평화구상안이 실현돼야 함을 강조했다. 그는 젤렌스키 대통령이 평화구상안을 수용하지 않을 경우 “그(젤렌스키 대통령)는 전쟁을 마음껏 계속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평화구상안 수용을 사실상 압박하고 나선 가운데 젤렌스키 대통령은 “역사상 가장 어려운 순간 중 하나에 직면했다”고 말했다. 그는 21일 텔레그램에 영상 성명을 내고 “지금 우크라이나에 가해지는 압박은 가장 심각한 수준이다. 존엄성을 잃거나 핵심 동맹국을 잃을 위험을 감수하거나 (미국이 제안한 평화구상안) 어려운 조항 28개를 받아들이거나 혹독한 겨울을 보내야 하는 상황”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향후 평화구상안에 대한 EU 국가들의 동향이 주요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비교적 우크라이나에 우호적 입장을 내비쳐온 EU 국가들이 트럼프 행정부가 제안한 평화구상안에 힘을 실어주게 되면 우크라이나로서는 수용하지 않을 명분을 찾기 어렵다. EU 국가들은 우선 ‘유럽의 입장이 평화구상안 논의 과정에 담겨야한다’는 일반론적 입장을 내며 신중한 모양새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는 전날 트럼프 대통령과 통화하며 “유럽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종식하는 모든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는 점을 전달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이날 “우크라이나에 대한 유럽의 통합은 유럽인의 손에 있다”며 유렵 주요국 입장이 평화구상안 논의 과정에서 배제된 점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동결된 러시아 자산의 소유권 일부가 “유럽인에게 있다”고 덧붙였다. 평화구상안엔 약 3000억 달러(약 441조원)에 달하는 동결된 러시아 자산 가운데 1000억 달러를 우크라이나 재건 및 투자 사업에 활용하고 수익의 50%를 미국이 가져가기로 한 내용이 담겼는데 이를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우크라이나 내부적으로는 젤렌스키 대통령 측근이 연루된 부패 스캔들의 향방이 평화구상안 수용 여부에 영향을 줄 것으로 관측된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오랜 친구이자 과거 동업자였던 티무르 민디치 등은 현재 정부 발주 사업비 약 1억 달러(약 1472억원)를 리베이트로 챙겼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개입 여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부패 혐의와 관련해 그의 이름이 계속 오르내리며 젤렌스키 대통령은 국내외적 압박에 직면한 상태다. 폴리티코 유럽판은 21일 미 백악관 고위 관계자를 인용해 “젤렌스키가 평화구상안을 수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익명을 요구한 백악관 고위 관계자는 폴리티코에 “우크라이나인들은 (합의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며 “젤렌스키 대통령의 현재 입장이 취약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