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제약·바이오 시장이 최근 가파른 성장세를 타고 있다. 시장조사기관 포천비즈니스 인사이트에 따르면 2023년 241억 달러이던 한국 제약·바이오 시장 규모는 연평균 9%씩 성장해 2032년 539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 제약·바이오 시장은 국산 신약 개발과 바이오시밀러가 성장을 주도하고 있다.
특히 최근 국산 신약이 속속 출시되며 시장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얼마 전 시판 허가를 획득한 SK바이오팜의 뇌전증 치료제 ‘엑스코프리’를 비롯해 유한양행의 폐암 치료제 ‘렉라자’, HK이노엔의 위식도 역류질환 치료제인 ‘케이캡’, 셀트리온의 자가면역질환 치료 바이오시밀러 ‘짐펜트라’ 등이 그런 신약이다.
세계 3위 신약 후보물질 보유국
글로벌 의약품 시장 비중은 미미
신약 가격 낮아 ‘코리아 패싱’ 생겨
국내 출시 지연, 제품 철수하기도
약값 관련 제도 투명성 높이고
외국사와 협력·제휴 강화해야
현재 한국은 미국과 중국에 이어 세계 3위의 신약후보 물질 보유국으로, 장래 신약 개발 전망도 밝은 편이다. 여기에 이재명 정부는 ‘글로벌 5대 바이오 강국’ 도약을 목표로, 제약·바이오 산업을 집중 육성할 계획이다. 바야흐로 한국 제약 산업은 도약을 향한 변곡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글로벌 5대 강국으로 가는 길은 아직 멀다. 글로벌 의약품 시장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미약하다. 2023년 기준 한국의 제약·바이오 시장 규모는 전 세계 시장의 1.4% 수준에 불과하며, 글로벌 순위는 13위 정도다. 약 1조7487억 달러에 달하는 전 세계 제약 시장에서 미국은 전체 시장의 38.9%를 차지하는 압도적 1위다. 그 뒤를 중국(14.2%)과 일본(5.0%), 독일(4.8%)이 따르고 있다.
제약·바이오 산업은 규제 산업이다. 정부의 규제 정책이 산업 경쟁력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우리가 글로벌 5대 강국으로 올라서려면, 무엇보다 성장의 동력인 ‘혁신’을 가속화하는 데 정책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 혁신적인 연구·개발(R&D)에 집중 투자하되, 제약·바이오 산업의 혁신을 가로막는 규제 요인을 과감히 해소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 신약 가격, 주요 15개국 중 최하위 이런 관점에서 우선 그동안 신약 가격을 억제해온 약가 정책에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 신약은 혁신의 산물이다. 신약 약가를 적정 수준으로 높여 혁신에 대한 보상을 강화하지 않고는 제약·바이오 산업의 지속적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다.
한국의 신약 가격은 전 세계 주요국 중 최저 수준이다. 지난 8월 런던 보건열대의학대학원(LSHTM) 연구진이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주요 15개국에서 시판된 140개 혁신 신약(항암제 및 희귀질환 치료제)의 평균 약가를 비교한 결과, 한국의 약가가 최하위로 나타났다. 비교 대상 국가 중에는 미국과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캐나다, 호주 같은 선진국도 있었지만, 한국보다 1인당 소득 수준이 훨씬 낮은 튀르키예와 중국, 브라질, 러시아, 인도, 남아프리카공화국 등도 포함돼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 건강보험이 지출하는 전체 약품비 중에서 신약 약품비가 차지하는 비중도 매우 낮다. 동덕여대 약학과 조사에 따르면 지난 6년(2017~22년)간 건강보험이 지출한 신약 약품비 비중은 전체의 13.5%로 나타났다. 이 또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저 수준이다.
반면 한국의 제네릭 의약품(오리지널 의약품의 특허 만료 후 출시되는 성분·효능이 동등한 의약품) 가격은 전 세계 주요국의 제네릭 약가 대비 평균 40~50% 정도 높은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국내 제약사는 아직도 매출의 절반 이상을 제네릭 판매에서 올리고 있다.
한마디로 우리나라는 혁신적 연구·개발을 통해 개발하는 신약에 대한 보상에 매우 인색하다. 제약·바이오 산업이 도약기를 맞고 있는 지금, 정부의 약가 억제 정책에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 혁신 신약에 대한 적정한 보상을 통해 제약·바이오 기업이 혁신 노력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낮은 약가에 외국 제약사 투자 기피 낮은 신약 약가는 ‘코리아 패싱’을 부른다. 한국의 낮은 약가 때문에 외국 제약사가 국내 시장에서 신약 출시를 지연하거나 제품을 철수하는 사례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심지어 국내 바이오 기업도 개발한 혁신 신약을 국내 시장이 아닌 미국 등 해외 시장에서 먼저 출시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 글로벌 제약사인 아스트라제네카사가 제2형 당뇨병 치료제 ‘포시가정’을 한국에서 철수한 것이 코리아 패싱의 한 예다. 이 약은 신장(콩팥)에서 포도당의 재흡수에 관여하는 SGLT-2 억제제로 최초 개발된 우수한 혁신 신약이었다. 하지만 2014년 9월 건강보험 급여 품목에 등재될 때 정해진 약가 상한액은 기존 당뇨병 치료제보다도 낮은 10㎎당 784원이었다. 그 후 건강보험공단과의 약가 인하 협상을 거치면서 760원에서 734원으로 계속 인하되다가, 급기야 2023년 4월 물질특허 만료로 393원 수준까지 하락할 상황에 처하자, 아예 한국시장에서 철수해 버린 것이다. 철수 당시 이 약의 해외 가격은 2000~3000원 사이였다.
낮은 약가는 신약뿐 아니라 외국 제약사의 철수나 투자 기피로 이어질 수 있다. 영국은 우수한 의약품 연구 인력과 개발 인프라를 갖추고 있음에도, 최근 머크 등 다국적 제약사가 잇따라 영국 시장을 떠나고 있다. 영국에서 의약품을 구매하는 국민보건서비스(NHS)가 약가 지출을 지나치게 줄여왔기 때문이다. 현재 영국의 전체 의료비 중 약제비 지출 비중은 9% 내외로, OECD 국가의 평균 약제비 비율(15~20%)보다 현저히 낮은 수준이다. 영국의 약제비 긴축 정책이 제약 산업의 경쟁력을 갉아먹고 다국적 제약사의 영국 철수를 야기한다는 지적이다.
투명성이 부족한 국내 약가 관리 기준과 절차도 개선해야 한다. 보험급여의 적정성을 심의하고 약가를 책정하는 기준과 절차가 불투명할 뿐 아니라, 건강보험 급여에 등재된 의약품에 대한 약가 사후관리 제도도 지나치게 복잡하고 다양한데다 중복 적용되고 있다. 이처럼 복잡한 약가 사후관리 제도를 통합하고 약가 관리의 예측 가능성을 높여 제약사의 경영 불확실성을 해소할 필요가 있다.
첨단 치료기술 과감히 수용해야 나아가 혁신의 첨병이라 할 수 있는 첨단 재생 의료, 특히 환자맞춤형 유전자·세포치료제의 적용을 가로막는 법과 제도를 과감하게 정비해야 한다. 미국 등 해외에서 승인한 치료제나 진단서비스를 국내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할 필요도 있다. 예컨대 현재 국내에는 특정 항암제가 특정 암 환자에게 효과적으로 작용하는지를 검사하는 해외 동반검사(CDx)를 국내 암 치료에 적용할 수 있도록 승인하는 제도가 없다. 그 결과 미국 식품의약처(FDA)의 승인을 받은 동반검사 서비스를 국내에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제도적으로 혁신 의약품과 첨단 치료기술을 과감히 수용하는 것은 국내 제약·바이오 산업의 지속적 혁신을 위해 바람직하다. 혁신에 발맞춰 규제 당국의 유연한 정책 운용과 기민한 제도 개선이 요구된다.
디지털 치료제 등 첨단 의료기기에 대한 경직된 규제 체제도 개선해야 한다.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허가를 받은 혁신적 의료기기가 시장에 나오고 있지만, 불합리한 보험수가 구조로 인해 시장이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 개발사가 임시등재 형태로 지급하는 낮은 급여 수가를 감수하거나, 비급여로 높은 가격에 판매하는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는 디지털 의료기기 산업이 성장하기 어렵다.
외국 제약사 R&D 센터 유치 필요 글로벌 5대 바이오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또 다른 전략은 외국 제약·바이오 기업과의 제휴와 협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런 전략적 시각에서 외국 제약사의 국내 투자나 R&D 센터 설립을 적극 유치해야 한다. 국내 제약·바이오 산업은 국내 기업의 내재적 성장만으로는 도약하기 어렵다. 글로벌 시장으로의 진출이 필요하다. 외국 제약사는 우리 기업의 해외 진출을 위한 발판이 될 수 있다.
최근 출시된 블록버스터급 의약품 ‘렉라자’는 국내외 기업 간 협력의 성공 사례다. 폐암의 진행과 사망 위험을 현저히 낮추는 것으로 알려진 이 신약은 국내 제약기업이 미국에 설립한 스타트업이 2015년 개발한 후보물질에서 시작됐다. 이 물질을 유한양행이 이전받아 자체 기술력과 자본으로 발전시킨 뒤, 약 1조6000억원을 받고 얀센에 기술을 수출했고, 나아가 얀센과 함께 개발한 병용요법을 통해 2024년 8월 FDA 승인을 획득하면서 렉라자가 탄생했다.
글로벌 제약사의 투자와 협력을 끌어내기 위해 바이오 클러스터의 역할도 중요하다. 현재 국내에는 25개 이상의 바이오 클러스터가 있다. 이를 통해 글로벌 제약사의 국내 투자를 유치하고, 이들과 국내 스타트업 및 제약사 간 ‘오픈 이노베이션’(개방형 혁신)을 주선하는 등 국내 제약사의 해외 진출을 지원할 수 있는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