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방 세 개짜리 아파트에 살고 있어. 은행가들이 매일 저녁과 술 접대를 하고, 젊은 여성들이 우리 집에 오고 싶다고 달라붙어. 내 아파트 침실은 여자들과 사랑을 나누기 위한 할렘이야.” 2001년 5월 칼라일그룹 한국사무소 직원이 지인들에게 보낸 ‘나는 왕처럼 살고 있다’는 이메일이 한국 금융계를 발칵 뒤집어놨다. 워싱턴포스트는 “한국 은행산업의 추악한 단면”이라고 보도했다.
국제소송서 론스타에 완승했지만
국내 은행, 경쟁력·혁신성 떨어져
방심하면 또 굴욕적 재앙 맞을 것
외환위기의 충격이 남아 있던 당시 부실 은행들은 외국 자본의 투자를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한미은행은 칼라일, 제일은행은 뉴브리지캐피털 등 미국계 사모펀드에 넘어간 상태였다. 조흥은행·서울은행도 해외 투자자를 간절히 찾고 있었다. 한국에 파견된 사모펀드 관계자는 VVIP 대접을 받았다. 텍사스에서 설립된 사모펀드 론스타도 한국의 부실 은행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론스타는 원래 서울은행을 인수하려 했으나 하나은행에 밀렸다. 전윤철 전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2008년 외환은행 헐값 매각 재판에서 “서울은행을 매각할 때 론스타도 신청했지만 사모펀드라서 은행법과 금산법상 자격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한국은 2001년 8월 IMF 구제금융 195억 달러를 모두 갚았다. 국가신용등급도 외환위기 직후 B+(투기등급)에서 2002년 A-(안정)로 상향 조정됐다. 제일·한미은행을 사모펀드에 급하게 매각할 때보다 훨씬 여유가 있는 상황이었다. 금융당국은 투기 목적 펀드가 아닌 금융을 본업으로 하는 투자자에게 파는 게 원칙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론스타는 인수 자격 논란에도 불구하고 2003년 외환은행을 인수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론스타는 10년 만에 인수가의 세 배 값에 하나금융에 넘겼을 뿐, 외환은행의 혁신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막대한 차익에도 론스타는 2012년 국제투자분쟁해결기구(ICSID)에 한국 정부를 상대로 6조원대의 소송을 제기했다. 한국 정부의 승인 지연으로 더 높은 가격을 제시했던 HSBC에 팔지 못해 손해를 봤다는 이유였다. 22년간 이어진 론스타와의 악연은 ICSID 국제소송에서 한국 정부의 완승으로 마무리됐다. 김민석 국무총리는 “대한민국의 금융 주권을 인정받은 국가적 경사”라고 자화자찬했다.
그러나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는 노무현 정권 때 벌어졌다. 최고 의사결정권자는 김진표 당시 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이었다. 김 부총리는 그 뒤 민주당 원내대표와 국회의장에 올랐다. 한마디로 금융 주권을 투기자본에 넘긴 책임은 민주당 정권에 있다.
누가 잘했냐, 잘못했느냐를 떠나 외국 자본이 한국 금융 발전에 기여했으면 다행이다. 하지만 론스타 사건 이후 한국 금융업계는 발전했는가.
현재 한국 은행 산업은 5대 메이저 중심의 과점체제다. 글로벌 은행들에 맞서 대형화를 유도한 결과지만, 커진 몸집만큼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은행들은 주택담보대출 등 비생산적인 곳에 쏠려 있고, 혁신 스타트업이나 기술 기반 제조업에 대한 금융 지원은 미흡하다. 국제 금융 실력은 중국·싱가포르 은행보다 뒤처져 있다. 주택 가격 폭락 등 위험이 현실화되면 외환위기 같은 재앙이 다시 오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지금 정부는 ‘치맥 파티’를 열며 자축할 때가 아니다. 론스타 사건의 교훈을 복기해 한국 금융산업의 체질을 개선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논공행상에 따라 친정권 인사를 금융권 고위직에 ‘낙하산’ 식으로 투하하는 구태부터 멈춰야 한다.
외환위기 당시 공적 자금 투입을 주도했던 한 고위 관료는 한국 금융의 현주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외환위기 직후엔 은행들이 살아남아야겠다는 절박감이라도 있었지. 지금 은행들은 전산시스템에 투자한 것 말고는 변한 게 별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