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 동조 공직자를 솎아내자며 나흘 전 정부의 ‘헌법존중 정부혁신 TF’가 발족됐다. 민주당 박균택 의원의 인식이 눈에 띈다. ‘내란 동조 기준이 뭐냐’는 질문에 고검장 출신인 그의 답.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발동했을 때 교도소에서 빈방을 체크하기 위해 협력했던 교정 공무원들이 있을 것 아니냐. 법무부의 국장 중 한 명은 그것(협력)을 즐거워하거나 윤석열에게 안 좋은 상황이 전개될 때마다 걱정하는 언행으로 부하들의 지탄을 받았던 공직자가 있다. 그런 공직자가 잘 되면 어느 부하가 수긍하며, 앞으로 국가의 불법적 상황에서 누가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겠느냐.” 총리실은 조사를 위해 공직자 휴대전화의 자발적 제출을 유도하고, 협조하지 않으면 직위 해제, 수사 의뢰를 고려한다고 했다.
‘상대편 걱정’도 처벌하자는
마키아벨리식 무자비 정치
권력의 목적은 국민 안녕뿐
‘폭력’으로의 변질 절제해야
정리하면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걱정했거나, 핸드폰에 흔적을 남겼다면 직위 해제를 각오해야 하겠다. 그런데 이건 어떤가. 최근 초췌해진 윤 전 대통령이나 김건희 씨를 보며 “있을 땐 그리 밉고 싫었는데 좀 안되긴 했다” “얼굴이 핼쑥한 걸 보니 당뇨가 심하긴 한 것 같다” “저 양반 소폭 마시고 싶어 금단 온 거 아닌가” “혹시 극단적 생각을 하는 건 아니냐” 같은 저잣거리의 얘기들 말이다. 이건 ‘걱정’과 ‘애정’인가, 아니면 그냥 ‘궁금증’ ‘인지상정’인가. 헷갈리지만 조심은 해야겠다. 신고나 투서가 있을 수 있으니 말이다. 빨리 핸드폰에서 무언가를 지워야 할 위기의 공직자들이다. 동시에 법사위의 여당은 항명했다며 검사장 18명을 고발했다. “나가려면 빨리빨리 나가라”는 압박에 더해 검사를 일반 공무원처럼 파면하거나, 검사장 급을 평검사로 강등할 수 있는 법 개정에 돌입했다.
물론 자리 보전, 승진 위해 대통령 눈치보기 바빴던 검찰의 업보를 부인할 수 없다. 한 민주당 재선 의원은 “지난 3월 윤석열 대통령 구속의 취소 결정에 즉시 항고를 포기할 때는 잠잠하던 이들이 바로 검찰 아니었느냐”고도 반문한다. 모든 정권마다 전임 정부 주요 공직자들을 좌천, 해임시키고 물갈이해 온 이 오래된 경로에의 의존은 이젠 체념의 대상이다. 백마고지전처럼 여야가 자리를 교대, 상대에 보복하고 자기 권력 굳히려는 정치 엘리트들끼리의 기득권 나눠먹기 순환은 구조화됐다. ‘권력’과 ‘폭력’의 경계선이 갈수록 모호해지고, 국민 역시 둔감해진 건 위기의 가장 큰 위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욕 좀 먹더라도 정치는 이렇게 무자비해야 한다고 가르친 천재가 있었다. 마키아벨리다. 어진 공맹(孔孟) 따위보다 철저히 정치적 사실주의에 천착했던 그의 훈시다. “인간이란 본래 배은망덕, 변덕스러우며 가식·위선적이다. 두려워하게 하는 자보다 사랑하는 자를 더 쉽게 해친다. 그러니 군주는 사랑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돼야 더욱 안전하다. 사랑이란 이해가 얽힌 기회 앞에선 쉽게 끊어지지만, 처벌의 공포에 따른 두려움은 결코 저버릴 수 없다. 모든 점에서 선하려는 이는 선하지 않는 자들에게 파멸된다. 권력에서 중요한 건 결과뿐이다. 자비로움과 잔인함. 그중 잔인함을 취하라.”
마키아벨리는 디테일도 주문했다. “행운이나 남의 도움으로 군주 된 자는 곧바로 새 권력 기반을 구축하라. 행운이란 변덕스럽기 때문이다. 군주를 해칠 자들은 바로 말살하고, 힘과 기만으로 구질서를 혁신하며, 자기편을 확대하라. 부자는 가난하게, 가난한 자는 부자로 만들어라. 세워진 도시들은 헐고 새로 만든 도시에 모두를 이주시켜 이전 질서를 완전히 제거하라.” 마치 그가 환생한 듯 최근의 내란 세력 척결, 검찰 궤멸, 대법원 개조, 부동산 압박 같은 여권의 강공은 상당히 폭력적이다. ‘관용’ ‘협치’ 같은 점잖은 조언일랑 구차스럽다.
역설적으로 그 모든 해법은 마키아벨리가 깨닫지 못한 진리들에서 찾을 수밖엔 없다. 우선 1500여 년 전의 마키아벨리는 본 적이 없던 민주주의로 ‘제왕적 대통령’의 임기는 5년으로 줄었다. 그러니 두려움에 의한 충성은 잠깐일 뿐이다. 공직자들은 언젠가의 ‘직권 남용’ 처벌이 더 무섭다. 이젠 ‘걱정’도 처벌 대상이다. 그저 무서운 척하면서 4년 반 쥐 죽은 듯 지내면 될 뿐이다. 마키아벨리는 무엇보다 목적과 수단을 착각했다. 군주의 ‘책사’ 일자리가 필요했던 그에겐 군주의 안위가 유일한 목적이었다.
하지만 민주주의 정치의 목적은 단 하나, 나라·국민과 후대의 평온·번영이어야 한다. 신질서 구축을 위해 곳곳에서 발생한 이 거대한 갈등의 에너지는 권력의 안위가 아니라 오로지 이 민주주의의 숭고한 목적을 위해 사용돼야 한다.
마키아벨리는 특히 폭력·간계의 영원한 악순환, 바로 ‘업보’를 몰랐다. 피지배자의 동의 없는 폭력·간계란 그저 영원히 돌고 돌 뿐이다. 어떤 경우든 완벽히 죽일 수 없는 게 사람이다. 멀리 볼 게 있나. 자신이 구사했던 ‘폭력’을 온전히 되갚음당하는 이가 윤석열 전 대통령 아닌가. 모든 권력은 그러니 절제돼야 한다. 폭력으로 뛰쳐나가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