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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vs 왕궁 인근 풍경…서울∙도쿄 엇갈린 20년 [종묘 앞 개발 갈림길]

중앙일보

2025.11.23 12:00 2025.11.23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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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앞 세운지구(위 사진)는 문화재 경관 훼손 논란 속에 개발이 늦어지면서 도심 속 섬처럼 슬럼화됐다. 일본 도쿄의 왕궁과 주변 마루노우치 일대는 고층 재개발이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다. 김성룡 기자, [사진 마이니치신문]
지난 14일 오후 일본 도쿄의 심장부인 왕궁(皇居). 일왕의 거주지를 보기 위해 수백 명의 관광객이 만들어낸 긴 줄 사이로 하늘 높이 솟아오른 대형 크레인이 보였다. 도쿄해상빌딩 재건축 현장이다. 왕궁과 도쿄역(국가지정문화재) 사이, ‘도쿄의 월스트리트’로 불리는 마루노우치(丸の内丸の内)를 현재의 마천루 풍광으로 일궈낸 1호 건물이다. 공사 현장은 왕궁의 출입구인 기쿄몬(桔梗門)에서 약 300m 떨어져 있고, 국가지정특별역사유적인 에도(江戸)성 해자(垓字)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100m 높이의 건물을 110.9m, 지상 20층 지하 3층으로 새로 짓는다. 2028년 8월 완공 예정이다.

도쿄해상빌딩만이 아니다. 상장 기업 145곳이 자리 잡은 마루노우치 일대엔 최근 고층 재건축 바람이 불고 있다. 왕궁 인근 ‘오마루유(오테마치·마루노우치·유락초)’ 지역과 도쿄역 인근에서 현재 진행되는 대규모 공사만 해도 9개에 달한다. 도쿄역 동쪽 지역에서는 37개 빌딩을 해체해 지상 28층, 지하 4층, 높이 223m의 복합빌딩을 짓고 있다. 2029년 완공되면 상업시설·버스터미널·공연장 등이 들어선다. 도쿄역 서측에는 2028년께 완공 예정인 ‘토치타워’ 공사가 한창이다. 높이 385m, 지상 62층 규모로 일본 최고층 건물이 될 전망이다.

1996년 도쿄역 일대 마루노우치 풍경. [사진 지지통신]
1990년대 중반까지 낮은 건물 일색이던 일본 왕궁앞 마루노우치는 재개발로 고층 건물이 즐비한 금융타운으로 거듭났다. 김현예 기자
이 지역에선 2000년대 이후 두차례 집권한 아베 신조 총리가 경기 부양을 위해 규제 완화를 앞세운 국가전략특구 정책을 펼친 것도 고층 개발을 가속화했다. 최근에는 왕궁과 가까운 곳은 100m, 멀어지면 200m 높이로 짓는 ‘절구형 스카이라인’이 적용되고 있다. 도쿄도와 지요다구, JR동일본과 오마루유 지구마을 만들기 협의회 등으로 구성된 민관협의체가 만든 기준이다. 오사와 아키히코 도요(東洋)대 건축학과 준교수는 “토치타워는 200m라는 가이드라인에서 벗어나지만 (가이드라인에는) 도시 상징성을 창출하는 것은 200m를 초과해도 된다는 문언이 포함돼 있다”며 “왕궁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고 반대편이라는 점에서 왕궁 경관에 미치는 영향이 적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마루노우치 개발 과정에선 경관 훼손 논란도 있었다. 1960년대 초 도쿄 올림픽 (1964년)을 앞두고 도시 재개발 필요성이 제기되고 도쿄해상이 1918년 준공했던 도쿄해상빌딩을 처음 재건축할 때 사토 에이사쿠(佐藤栄作) 당시 총리가 “왕궁을 내려다보는 빌딩을 세우는 것은 불경하다”며 반대하면서다. 결국 128m 높이로 지으려던 건물을 100m 높이로 낮추는 것으로 규제의 벽을 넘을 수 있었다.



시장 바뀌면 높이도 바뀌어…정치적 판단에 휘둘린 세운지구

세계유산이 몰려 있는 교토에서도 비슷한 논쟁이 있었다. 199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닌나지(仁和寺) 앞에는 연면적 약 5900㎡, 지상 3층 지하 1층 규모의 고급 호텔이 영업을 앞두고 있다. 원래 제1종 주거지역으로 연면적 3000㎡ 이상의 숙박시설은 지을 수 없었지만, 교토시는 외국인 관광객이 증가하자, 2023년 특례 규정을 적용해 호텔 건설을 처음 허가했다. 대신 ‘닌나지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건물이어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했다.

도시계획 전문가인 무네타 요시후미(宗田好史) 간사이(関西)국제대 국제커뮤니케이션학부장(교수)은 “경관 리뷰로 불리는 주민 참가 제도를 통해 지역 주민과 경관마을만들기 협의회(2008년)를 만들어 17년간 협의한 결과, 닌나지 앞에 호텔을 지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서울 종로구 종묘(宗廟) 앞 세운지구의 시계는 20년 넘게 멈춰 있다. 지난 21일 찾은 종묘 앞 세운지구는 도심 한복판 상업지역인데도 노후화가 심해 1960~70년대 판자촌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총 39개 재개발구역 중 일부 개발이 끝난 구역을 제외하고 상당수 지역이 슬럼화돼 있었다.

20년 넘게 개발이 정체되면서 낙후된 종묘 인근 세운지구의 모습. 김종호 기자
종묘 맞은편에 있는 세운4구역(3만2222㎡)은 허허벌판이었다. 2004년부터 정비사업을 추진해 기존에 있는 저층 건물들을 철거하고 공사 가림막까지 세웠지만, 공사는 여전히 답보 상태다. 그동안 문화재 관련 심의만 13차례 받았으나 고층 재개발과 세계유산인 종묘 경관 보존을 놓고 도돌이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4구역의 시행사인 SH공사는 토지보상비, 임차인 이주비 등으로 20년간 사업비 7250억원을 썼다. 그동안 350여 명이던 토지 등의 소유자는 상당수가 고령으로 세상을 떠났거나 현금청산을 택해 현재 140여 명만 남았다. 김종길 세운4구역주민대표회의 위원장은 “주민이 살아야 종묘도 보존되는 것 아니냐, 민생을 챙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하소연했다.

세운지구가 이렇게 된 건 오락가락 행정 탓도 있다. 서울시장이 바뀔 때마다 세운지구의 높이가 춤을 췄다. 4구역의 경우 2004년 이명박 서울시장 시절 최고 높이 90m로 재개발을 처음 추진했다. 이후 오세훈 시장 때 122m로 높아졌다가 박원순 시장 때 71.8m로 낮춰졌고, 최근 다시 141.9m(오세훈 시장)로 추진하면서 ‘종묘 대전(大戰)’에 불이 붙었다.

한국 1세대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세운상가를 허물지 말고 보존해야 한다거나 도시를 동서로 단절시키는 세운상가군을 허물어 공원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서기도 한다.

정치적 논쟁 대신 사회적 협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높다. 백진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는 “박원순 전 서울시장 때 세운상가를 보존하고 재생사업을 통해 활성화하려 했지만 실패했던 만큼, 건물을 허물고 녹지축으로 만든다면 원도심 활성화에 새로운 계기가 될 것”이라며 “이를 위해 민간 인센티브에만 기댈 게 아니라 중앙정부도 협력하고 지원해 높이를 낮춘다든지 같은 논의의 장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말했다. 일본 오사와 준교수는 “세계유산 주변의 환경·경관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시민, 토지 소유주, 전문가, 행정이 일체되어 논의하고 방향성을 공유할 필요성이 있다”고 조언했다.




한은화.강혜란.김현예([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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