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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9년 만에 농가소득 10배로…100개국 퍼진 "잘 살아보세" [창간기획 대한민국 '트리거60'<53>]

중앙일보

2025.11.23 12:00 2025.11.23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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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트리거 60' <53> 새마을운동

새마을운동은 성과 평가를 통해 우수 마을을 차등 지원했다. 하천 정비사업 풍경. [중앙포토]
1969년 8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은 전용 열차를 타고 부산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열차가 경북 청도군을 지날 때, 차창 밖으로 유독 깔끔하게 정비된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박정희는 갑자기 “여기가 어디지? 기차를 세워 보라”고 지시했다. 열차가 선 곳은 신도마을이었다. 슬레이트 지붕으로 개량된 주택과 정돈된 담장, 깨끗한 마을 길이 시선을 끌었다. 마을 주민들은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보자고 마을 총회에서 결의해 자발적으로 공사를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김정렴 상공부 장관은 회고록 『한국 경제정책 30년사』에 “박 대통령은 이 경험을 통해 근면·자조·협동 정신을 각성시키면 농촌 전체를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고, 이것이 새마을운동의 밑거름이 됐다”고 적었다. 이후 청와대는 신도마을에 금일봉과 공동전화 1대, 그리고 주민 소득증대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양(羊)도 지원했다. 이듬해 4월 22일, 박정희는 부산에서 열린 한해(가뭄) 대책회의에서 “비만 기다리는 타성적인 사고로는 발전을 이룰 수 없다”며 농촌의 고질적 문제와 의식 구조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농민들의 자조정신을 일깨우는 운동이 필요하다”며 “이런 활동을 새마을 가꾸기 운동이라 불러도 좋고, 알뜰한 마을 만들기라 해도 좋다”고 언급했다. 이른바 이 ‘부산 훈시’는 새마을운동이 공식적으로 출범하는 전환점이었고, 훗날 4월 22일은 ‘새마을의 날’로 지정됐다.

새마을운동은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49년에 만든 농지개혁법과 58년 시작한 지역사회 개발사업은 농촌 근대화의 출발점이었다. 5·16 군사정변 직후 박정희는 농민들의 삶을 개선해야 민심도 얻을 수 있다고 여겼다. 정부는 고질적 농촌 문제 해결을 위해 농어촌 고리채 정리에 착수했다. 농어촌개발공사를 설립하고 농공병진 정책도 폈다. 농촌 여성들의 ‘좀도리 저축’(아침과 저녁에 쌀을 한 줌씩 덜어 모으는 방식), 마을금고 운동 등 자조와 절약 운동도 나타났다. 전국적으로는 ‘농어촌 소득증대 특별사업(농특사업)’도 시작됐다. 전통 농업 방식에서 벗어나 시장성이 높은 작물을 생산하는 영농 구조로 변화를 꾀했다.

하우스에 채소 기른 신농법 개발
68년 1차 농특사업에는 2만여 농가가 참여했고, 참여 농가의 소득은 도시 근로자 평균 소득을 뛰어넘는 성과를 올렸다. 이 시기 충북 청원의 하사용씨 성공 사례는 박정희에게 새마을운동의 필요성을 더욱 확신하게 만든 계기가 됐다.

머슴살이와 잡부 일을 전전하던 그는 창호지에 콩기름을 발라 만든 ‘콩기름 창호지 하우스’(초기형 비닐하우스 시설)를 이용해 채소재배에 성공했다. 70년 서울시민회관에서 열린 ‘전국 농어민 소득증대 특별사업 경진대회’에서 하씨의 발표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날 박정희는 단상으로 올라가 그의 손을 잡고 “무에서 유를 창조한 산증인”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씨는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그의 성공담은 새마을운동의 대표 교육 교재로 활용됐다.

농가들의 참여가 늘어나면서 72년 농특사업은 ‘새마을 가꾸기’와 통합·확대돼 ‘새마을 소득증대 사업’으로 바뀌었다. 그해 5월, 박정희는 광주에서 열린 전국 새마을 소득증대 경진대회에 참석해 새마을운동의 방향과 성격을 더욱 명확히 드러냈다. 박정희가 작성한 이날 연설의 초고문은 16쪽이다. 최고 통치자의 농촌 개발에 대한 치밀한 디자인과 지원 의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새마을운동이란 시멘트와 철근을 가지고 농로를 닦고 다리 놓는 것 등의 일이다. 쉽게 말하면 잘살기 운동이다. 근면·자조·협동이 새마을 정신이다…. 이제부터 이 사업은 소득증대 사업으로 이끌어가야 한다.”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라는 귀에 익은 새마을운동 캠페인 노래가 나온 것도 이즈음이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로 시작하는 새마을 노래도 전국에 울려퍼졌다. 72년 박정희 대통령이 가사를 붙인 곡이다. 마을회관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나오는 이 노래가 이른 아침부터 주민들의 잠을 깨웠다. 1년 365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면서 새마을운동은 주민들의 일상 그 자체가 됐다.

새마을운동은 지붕 개량 숫자, 하수구 개선, 마을 도로 개선 길이, 마을 하천 개선, 마을금고 자산, 농가소득 금액, 공동사업 숫자 등 10개의 지표를 중심으로 평가했다. 이 지표는 매우 간단하고 객관적이어서 누구나 이해할 수 있었다. 정부는 전국 3만4000여 개 마을의 성적을 이 지표에 따라 평가해 우수 마을에는 더 많이 지원했다. 성과에 기반한 차등 지원 전략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새마을운동 현장을 자주 방문해 주민들을 격려했다. [중앙포토]
박정희 대통령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새마을운동 우수 마을을 직접 방문했다. 새마을 훈장도 도입했다. 우수 새마을 지도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격려했다. 새마을 지도자들이 언제든지 도지사·시장·군수를 만날 수 있는 증서를 만들어 줬다. 새마을운동이 전개된 70년대 전국의 모든 농촌 마을에는 남녀 각 한 명씩의 지도자가 활동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79년 말 전국에는 7만1000여 명의 지도자가 있었다. 하사용씨 같은 새마을 지도자들은 “목구멍을 위한 농사가 아니라 돈 버는 농업을 해야 한다”고 호응했다. 이들은 마을을 경영하는 CEO였다.

“유신은 곧 새마을운동”이라는 정부 시책에 따라 공무원 교육도 이뤄졌다. [중앙포토]
72년 10월 유신 후 정부는 새마을운동을 더욱 독려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이 곧 새마을운동”이라고 선언했다. 새마을운동은 도시지역으로도 퍼졌다. 매월 1일 집 앞 청소하기, 이웃 돕기, 환경 정비, 저축 및 폐품 수집 등 도시민들의 생활 개선 운동이 벌어졌다. 당시 새마을운동이 유신체제를 강화하고 박정희 장기 집권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수단으로 이용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또 일각에선 새마을운동이 근대화를 너무 강조하다 보니 전통문화를 억압하고 없앴다고 비판한다. 마을의 고유한 문화(장승이나 서낭당 등)나 전통은 ‘낡은 것’으로 간주했다. 일부 지역에선 “미신의 상징인 당산목(마을 입구의 오래된 나무로 제를 지내기도 했다)을 베어야 한다”며 주민 사이에 큰 갈등을 빚기도 했다.

도시에서도 환경 개선을 중심으로 한 새마을운동이 펼쳐졌다. [중앙포토]
5공 때 부패·비리 스캔들에 휘말리기도
하지만 새마을운동을 통해 한국 농촌이 단시간에 근대화를 달성했다는 점을 부인하긴 어렵다. 내무부 통계에 따르면 70~79년 동안 농가의 호당 평균 소득은 10배 증가했다. 보릿고개가 사라졌다. 전기와 상수도가 농촌에 보급돼 77년에는 농민 세대 98%가 혜택을 봤다. 마을 진입로와 안길도 넓어져 자동차가 다닐 수 있게 됐다.

1980년대 새마을운동은 변질·퇴색됐다. 새마을운동은 5공화국 출범과 함께 정부 주도 체제에서 민간 주도 체제로 전환된다. 새마을운동 중앙본부가 정부 역할을 대신했다. 전경환(전두환의 동생) 체제에서 부패와 비리 스캔들이 터지면서 새마을운동의 성과는 빚이 바랬고, 그 위상도 추락했다.

지난 7월 새마을운동중앙회는 동티모르 마을 지도자들을 초청해 교육 행사를 열었다. [중앙포토]
이런 부침에도 세계적 경제학자 제프리 삭스 교수는 “한국의 성공에서 가장 놀라운 대목 중 하나는 새마을운동”이라고 평했다. 2013년 새마을운동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된 것이 이를 방증한다. 1970~79년까지 생산된 대통령 연설문과 결재문서, 새마을 사업 공문, 마을 단위의 사업 서류, 새마을 지도자들의 성공사례 원고와 편지, 관련 사진과 영상 등 2만2000여 건의 자료가 등재됐다. 유엔은 보고서에서 “새마을운동은 한국형 빈곤퇴치 운동이자 농촌개발 운동”이라고 했다. 2005년 유엔은 아프리카 빈곤퇴치 프로그램의 하나로 새마을운동을 선택했다. 이후 중국·미얀마·캄보디아·라오스·르완다·우간다 등 100여 개 나라로 퍼져나간 새마을운동은 ‘한국형 공적 개발원조(ODA)’의 대표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현재 새마을운동은 사회봉사, 재난 구조, 공동체 운동 등 지역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공동체의 합심과 자조 노력을 통하면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새마을운동이 한국 사회에 남긴 유산이다.

김지윤 기자
창간 60주년 기획 '대한민국 트리거 60'은 아래 링크를 통해 전체 시리즈를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joongang.co.kr/issue/11765

※다음은 ‘중동건설 붐’ 편입니다.

한도현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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