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김성진 기자 = 다그 함마르셸드 전 유엔사무총장은 1961년 9월 콩고민주공화국 내전을 해결하던 중 의문의 비행기 추락사로 순직한 인물이다.
스웨덴 출신인 그는 제2대 유엔사무총장에 재임(1953∼1961년)했다. 1956년 이집트 수에즈 운하 사태와 관련해서 최초의 유엔평화유지군(당시 유엔긴급군·UNEF)을 시나이반도에 배치했다.
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비공식·비공개 회의를 통해 안보 관련 동향을 지속적으로 파악해 위기 상황에 공조하게 하는 이른바 '예방외교'(preventive diplomacy)를 주창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한국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 사무총장이 된 그는 전투기가 격추돼 중국에 억류된 미 공군 장병들의 전원 석방을 중재하는 등 외교력을 발휘했다.
그는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 전쟁 등 중동 분쟁 해결에 힘쓰는 한편 식민 지배에서 갓 해방된 아프리카 국가 등 신생 독립국과 개발도상국가 등 약소국 상황에 꾸준히 관심을 기울이고 유엔 차원에서 적극 지원했다.
사무총장으로서 처음 해외 순방에 나선 가운데, 특히 아프리카 국가들을 찾아가는 데 열심이었다.
그는 1959년 1월 중동·아프리카 지역을 방문한 데 이어 그해 12월 중순부터 이듬해 1월 말까지 5주간 아프리카를 다시 찾았다. 당시 크리스마스를 맞은 곳은 기니였다. 이 기간에 그는 24개국의 영토 또는 지역을 방문했다.
50대에 들어서 비행기 사고로 별세하기까지 그는 자신의 남은 생애를 옭아맨 민주콩고 분쟁 해결에 동분서주했다.
당시 민주콩고에서는 독립 이후 정치 세력 간 주도권 다툼이 치열했고 급기야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식민 지배국이던 벨기에 용병의 지원을 받은 분리주의 세력에 의해 독립영웅 파트리스 루뭄바 초대총리가 총살된 것도 이즈음이다.
이런 와중에 함마르셸드는 콩고분쟁 해결을 위해 현재 잠비아 지역인 로디지아 북부 은돌라 공항에 접근하던 중 타고 있던 비행기가 원인 미상의 이유로 추락했다. 그를 포함한 16명의 탑승자 중 생존자는 없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둘러싸고 유엔 평화유지군과 갈등 중이던 콩고 반군이나 벨기에 출신 용병이 격추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또 미국 중앙정보국(CIA) 등의 지원을 받은 용병조직이 개입했다는 배후설도 나왔다.
유엔은 2015년 전문가 보고서에서 격추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이후 반기문 전 사무총장에 이어 안토니우 구테흐스 현 사무총장까지 나서서 거듭 재조사를 지시했으나 아직 미스터리는 풀리지 않았다
당초 함마르셸드는 콩고에 유엔콩고활동단을 계속 주둔시키려 했고 이 때문에 사방에서 공격받았다. 특히 옛소련의 공세가 거셌다. 소련 지도자 니키타 흐루쇼프는 그의 사임을 요구하기도 했다.
복잡다단한 아프리카의 위기 상황에 대응하는 동안에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은 함마르셸드는 숨지기 전 죽음을 예감한 듯한 글들을 남겼다.
최근 그의 일기와 묵상, 시 등 사적 기록물을 모은 책 '이정표'가 국내에서도 출간됐다.
이 책에는 자신의 십자가를 회피하지 않고 져야 한다는 함마르셸드의 신념이 여실히 나타난다. 루터교 신자였던 그는 평소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고전을 애독하는 한편 동양 고전 '대학·중용'의 영역판까지 섭렵했다.
그는 스웨덴 총리를 역임한 부친의 공무 중시 가풍을 이어받아 역대 최연소 스웨덴 재무차관과 중앙은행 총재 등을 역임한 뒤 외교계에 투신해 세계 제1의 외교관(유엔 사무총장의 별칭)이 됐다.
경제학 박사인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부자가 스웨덴 한림원에 회원이 되는 진기록을 세웠다.
아프리카 등 세계 평화에 이바지한 공로로 노벨평화상 최초로 사후 수상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