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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커버 판이라 한 권 더 샀어요”...‘표지 갈이’로 승부수 두는 출판계

중앙일보

2025.11.23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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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의 책 『채식주의자』 초판본(왼쪽)과 리커버 판(오른쪽). 리커버 판 표지는 이옥토 작가의 사진이다. 사진 창비
양귀자의 『모순』(1998), 한강의 『채식주의자』(2007), 구병모의 『파과』(2013), 최진영의 『구의 증명』(2015)…. 지난 1년간 교보문고 소설 베스트셀러에 오른 이들 작품에 공통점이 있다. 바로 책에 새 표지를 입힌 ‘리커버(recover) 판(版)’이란 거다. 한 출판사 관계자는 “오프라인 서점보다 온라인 서점에서 책을 구매하는 독자가 늘면서, 신간의 생명이 짧아지고 지속적인 노출이 어려워졌다”며 “새로운 디자인으로 리커버 판을 만들어 독자들에게 소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왼쪽부터 순서대로 헨리 데이빗 소로우 작가의 『월든』, 박완서 작가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노르웨이의 숲』 리커버 판 표지. 사진 은행나무, 웅진지식하우스, 민음사
업계의 분석처럼, 새 옷을 입은 책은 힘이 세다. 지난달 27일 한국어판 33주년, 55만부 판매 기념으로 교보문고에서 리커버 판이 나온 미국 작가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소설 『월든』(1993)은 출간 후 종합 베스트셀러 3위로 직행했다. 박완서 작가의 스테디셀러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1992)의 리커버 판 역시 출간 직후 종합 베스트셀러 9위에 올랐다.

리커버 판 유행의 시초격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2013·민음사)의 2017년 리커버 판. 세계문학전집으로 나왔을 때부터 현재까지 29쇄를 찍었던 이 책은 리커버 판 중 3판(최신판)으로만 53쇄를 기록한 스테디셀러다.
지난 4일부터 12일까지 서울 영등포구 더현대서울에서 열린 안전가옥 팝업 '장르연회'. 사람이 가장 붐비던 주말인 8일의 현장이다. 최혜리 기자
리커버 판 구매자는 대부분 이삼십대 여성이다. 지난 4일부터 12일까지 서울 영등포구 더현대서울에서 열린 팝업 ‘리딩 파티’(Reading party) 현장은 이 변화를 체감케 했다. 위즈덤하우스·안전가옥·다산북스 등 5개 출판사가 함께해 도서 400여종을 전시·판매했다.

이중 가장 큰 규모로 팝업을 진행한 위즈덤하우스와 안전가옥 모두 리커버 판으로 승부를 봤다. 팝업을 위해 출간한 새 책은 따로 없었다. ‘리딩파티’에 이들 출판사가 내놓은 한정판을 사려 방문, 실제 판매까지 이어진 독자만 주말 간 약 5000명에 달했다.
위즈덤하우스 팝업 기념 리커버. 왼쪽부터 구병모 작가의 『파쇄』, 조예은 작가의 『만조를 기다리며』, 성해나 작가의 『우리가 열 번을 나고 죽을 때』. 사진 위즈덤하우스
지난 8일 방문한 팝업 현장에서 만난 이승주(31) 씨는 “위즈덤하우스 팝업을 위해 부산에서 올라왔다. 구병모 작가의 『파쇄』 리커버 판을 갖고 싶어서 들렀다가, 옆의 안전가옥 부스에선 표지에 매료돼 열한 권이나 사게 됐다”며 “『파쇄』는 초판본도 가지고 있지만, 굿즈처럼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위즈덤하우스는 단편 시리즈 ‘위픽’ 100권 출간을 기념해 이번 팝업을 열었다. 김소연 위즈덤하우스 스토리팀 팀장은 “책 디자인만큼 굿즈도 신경 써서 준비했는데, 굿즈보다 책이 훨씬 많이 팔렸다”며 “조예은 작가의 리커버 판은 팝업을 연 지 3일 만에 모두 동났다”고 전했다.
안전가옥 쇼-트 시리즈 전종 리버시블(양면) 커버. 김효인 작가의 책은 맨 윗줄에서 오른쪽 끝에 있는 케이크 패턴의 표지다. 사진 안전가옥
안전가옥은 경장편 및 단편집 시리즈인 ‘쇼-트 시리즈’의 전종(全種) 리버시블(양면) 커버 교환행사로 화제를 모았다. 기존의 쇼-트 시리즈를 가지고 오면 무료로 리버시블 커버를 바꿔주는 행사다.

김수인 안전가옥 마케터는 “지난 2월 출간한 김효인 작가의 『사랑은 하트 모양이 아니야』부터 리버시블 커버를 선뵀는데, 팬들을 향한 감사함을 담아 이번 팝업에서 33권 전종으로 확대해보자는 의견을 냈다”고 했다. 김 마케터는 “책의 제목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좋아하는 디자인의 북커버를 구매하는 트렌드를 고려했다”고 덧붙였다. 책의 내용과 잘 어울리는 사진을 출판사 내에서 직접 골라 활용했다.
이옥토 작가가 박완서 작가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표지작업과 함께 진행한 책갈피 사진. 식물원에 있다던 싱아를 못 찾고 돌아오는 길에 만난 꽃과 풀을 찍어 만들었다. 사진 웅진지식하우스
독자들이 표지의 심미성만 평가하는 건 아니다. 『그 많던 싱아는…』는 박완서 작가를 존경하면서, 본인도 여성 사진작가로서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있는 이옥토 작가의 사진이 새 표지로 입혀지며 독자들의 호응을 더 많이 끌어냈다. 작품의 의도와 책에 입혀지는 새 옷의 콘셉트가 잘 맞아 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정다이 웅진지식하우스 편집자는 “이옥토 작가가 실제로 (책에 나온 식물인) 싱아를 찾으러 갔다가 실패했고, 그 과정을 담은 책갈피 굿즈와 책 표지를 냈다. 이 과정을 책 소개에도 밝혔다”고 말했다. 서사가 입혀진 덕에, 2025년 리커버 판본은 박완서 작가 타계 10주년을 맞아 나온 2021년 리커버 판본에 비해 8.5배나 더 팔릴 정도로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위즈덤하우스의 단편 시리즈 '위픽'이 100권 출간을 기념해 팝업스토어를 열었다. 디자인은 '한 조각의 문학'을 표방하는 위픽의 콘셉트에 맞춰 형형색색 초콜릿 모양의 판형으로 만들어졌다. 사진 위즈덤하우스
최근엔 리커버 주기도 빨라지는 추세다. 김소연 팀장은 “10년 전까지만 해도 몇 주년 기념 한정판 등 명분이 커야 표지를 바꿨는데 최근 3~5년 새 영화 개봉 기념, 브랜드 협업 기념, 계절 한정판 등 작품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디자인에 독자들이 호응하는 것 같다. 앞으로도 이런 변화는 계속될 거라고 본다”고 분석했다.



최혜리([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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