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원화 가치 하락(환율 상승)을 방어하기 위해 국민연금을 ‘소방수’로 투입하는 방안을 본격적으로 검토한다. 국민의 노후를 책임지는 국민연금을 동원하는 데 대한 우려도 만만치 않다.
기획재정부는 24일 “기재부와 보건복지부·한국은행·국민연금은 국민연금의 해외투자 확대 과정에서의 외환시장 영향 등을 점검하기 위한 4자 협의체를 구성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기재부는 “앞으로 4자 협의체에서는 국민연금의 수익성과 외환시장의 안정을 조화롭게 달성할 수 있는 방안을 논의해 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난 14일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국민연금 등과 긴밀히 논의해 환율 안정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한 뒤 열흘 만에 나온 후속 조치다.
정부가 환율 방어 수단으로 국민연금을 검토하는 건 원화 가치 하락 폭과 기간이 심상치 않아서다. 이날 서울 외환시장 주간 거래에서 달러당 원화값은 전날보다 1.5원 내린(환율은 상승) 1477.1원으로 마감했다. 원화 가치는 지난 4월 9일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정부가 주목하는 건 국민연금과 개인투자자의 해외투자로 인한 달러 수급 문제다. 반도체 경기 호조 등과 맞물려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가 늘고 있지만, 이런 해외투자 수요 탓에 원화 약세가 구조적으로 굳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이날 회의는 국민연금의 해외투자가 원화 가치에 미치는 영향 등을 점검하는 ‘킥오프’ 성격으로 진행됐다. 구체적인 방안은 발표되지 않았다.
시장에선 원화 가치 안정화 방안으로 국민연금의 전략적 환헤지 활용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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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 해외자산 팔거나, 국내주식 투자 늘리는 방안 거론
전략적 환헤지는 원화 가치가 국민연금이 미리 정해둔 기준보다 더 내려갈 경우 보유한 해외 자산의 최대 10%만큼 달러를 정해진 가격에 미리 파는 방법(선물환 거래)이다. 국민연금이 올해 8월 말 기준 보유한 해외 자산(771조원)을 기준으로 최대 521억 달러를 시장에 투입할 수 있다.
올해 말 만료되는 한국은행과 국민연금 간 650억 달러 규모 스와프 계약 연장도 거론된다. 국민연금은 해외투자를 위해 시장에서 달러를 사야 하는데, 외환보유액을 가진 한은과 직거래해 달러를 조달하면 외환시장에서 달러 수요가 줄 수 있다.
국민연금의 국내 주식 투자 비중 확대 등도 가능한 방안이다. 익명을 요청한 협의체 관계자는 “경상수지 흑자가 큰 상황에서 원화 가치가 하락(환율 상승)하는 상황인 만큼 국민연금의 해외자산 투자 속도를 조절해 달라는 의견도 있다”고 전했다.
다만 원화 가치 방어에 국민연금을 활용하는 데 대한 부담도 만만치 않다. 국민의 노후 자산인 국민연금의 수익률을 떨어뜨릴 가능성이 있어서다. 예컨대 국민연금은 환헤지 비용을 줄이고 환차익을 통한 기금 수익률 극대화를 위해 2015년부터 별도 환헤지를 하지 않고 있다.
외교적으로도 민감한 사안이다. 미국 재무부는 지난 6월 한국을 환율 관찰대상국으로 지정하며 국민연금과 한국은행의 외환 스와프 한도 확대 사례 등을 구체적으로 거론했다. 다만 정부 관계자는 “시장의 급격한 변동성을 완화하는 개입에 대해서는 미국 측도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다”며 “특히 급격한 원화 약세를 방지하기 위한 개입에 대해서는 환율 조작으로 보고 있지 않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