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살 진모 군은 돌 무렵 계란 이유식을 먹은 뒤 피부가 붓고 빨개졌다. 밀이 들어간 간장·된장을 섭취해도 발진이 나타났다. 검사를 해보니 밀·계란·견과류에 대한 식품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진군의 어머니는 "식당 갈 때마다 아이가 먹을 수 있는 걸 찾는 게 힘들었다. 유치원 등에서 쇼크가 올 때를 대비해 에피네프린(알레르기 반응 억제) 주사도 늘 챙겨야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2년 전 김지현 삼성서울병원 교수와 함께 조금씩 밀 섭취를 늘리며 알레르기를 치료하는 '경구면역요법'을 시작하면서 일상이 달라졌다. 밀 알레르기 관련 항체는 치료 후 10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현재 간장은 물론, 피자빵·짜장면까지 먹을 수 있다. 지난해엔 계란 경구면역요법에 시동을 걸어, 계란 프라이도 먹게 됐다. 진군 어머니는 "아이가 간장을 먹게 될 때 엄청 기뻤다. 못 먹는다고 줄만 긋던 식단표 확인도 훨씬 수월해졌다"면서 "치료 기간이 길긴 하지만, 알레르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고 말했다.
진군처럼 식품 알레르기를 앓는 어린 환자의 분석·치료에 가속이 붙고 있다. 이 질환은 식품 내 특정 성분 때문에 발진·호흡곤란 등의 반응을 보이고, 심하면 쇼크로 이어져 생명을 위협한다. 환자 수는 전체 아동의 4~6%로 추정되는데, 중증 아토피 피부염 등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 급식·여행 등 일상에선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스트레스에 따른 심리적 위축도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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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서울·서울대 연구팀, 아동 환자 데이터 모아 면역 체계 분석
이에 따라 안강모·김지현 삼성서울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김현제 서울대 의대 미생물학교실 교수 공동 연구팀은 삼성서울 등 전국 거점 병원 중심으로 중증 알레르기·면역질환을 가진 아동 환자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모으고, 이들의 면역 체계를 분석했다. 특히 진료 현장 도입 역사가 짧은 경구면역요법이 어떤 환자에 도움이 될지, 어떤 방법을 적용하는 게 맞을지 파악할 근거도 마련했다. 단순히 아픈 아동을 치료하는 걸 넘어선 셈이다. 여기엔 2021년 고(故)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의 기부금 3000억원이 마중물 역할을 했다.
식품 알레르기에 경구면역요법을 시행해본 결과, 면역 조절 기능이 활성화되는 긍정적 세포 변화가 관찰됐다. 장기적으로 알레르기 반응이 안정화되는 '면역 관용'이 형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 치료가 환자의 우울감이나 불안 완화에도 기여한 것으로 나타났다. 알레르기가 두려워 아예 안 먹는 것보다 점진적으로 섭취하는 게 '안전하게 음식을 택할 자유'를 찾아준 것이다. 김지현 교수는 "아동 환자 삶의 질을 개선하고, 더 나아가 미래를 바꾸는 데 도움을 줬다는 보람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유럽에선 주로 증상이 심한 땅콩 알레르기 연구가 많지만, 연구팀은 계란 등을 중심으로 치료법을 들여다봤다. 김지현 교수는 "한국은 음식 성분 등의 정보 공유가 부족한 편이다. 그래서 아이가 흔히 접하는 음식도 부모가 놓칠까 두려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아 외국과 다르게 갔다"고 설명했다. 다만 모든 식품 알레르기 환자가 경구면역요법을 할 수 있거나, 무조건 치료에 성공하는 건 아니다. 그래서 '자가치료'보다 의료진과의 충분한 상담·진료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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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춤형 치료 가까워져…"이건희 기부금 없었으면 불가능"
상대적으로 주목도가 낮은 소아 질환 특성상, 이건희 소아암·희귀질환 극복사업의 후원이 없었다면 다양한 면역 치료법 개발 등은 불가능했다. 연구 성과는 식품 알레르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아토피 피부염까지 이어진다. 김지현 교수는 "경구면역요법이 중증 아토피 피부염 치료에 미치는 영향도 보고 있는데, 도움될 가능성이 꽤 높다"면서 "이건희 회장의 뜻 덕분에 이런 투자가 계속될 기반을 마련하고, 해외 연구자에게도 뒤처지지 않게 됐다"고 말했다.
이제 연구팀은 재발 여부 예측과 환자별 맞춤형 치료라는 다음 단계를 바라보고 있다. 경구면역요법을 거쳐 치료된 아동과 재발하는 아동을 구별하는 '바이오마커'(몸속 세포·단백질 등을 통해 체내 변화를 알아내는 지표) 등을 개발하고, 국내 환자 특성에 따라 치료 결과를 예상해 그에 맞는 치료법을 적용하는 게 이들의 목표다.